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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워싱턴의 통일 장관

이성철 기자

입력 : 2014.12.10 12:21|수정 : 2014.12.10 12:21


미군 병사들의 판초우의 위로 빗줄기가 내리쳤다. 싸늘한 전장에 선 전사들은 말이 없다. 앞으로 전진 또 전진이다. 60여 년 전 난중의 그날처럼 빗줄기가 병사들의 판초우의를 적셨다. 서경 77도 2분 51초, 북위 38도 53분 16초.
 
시공을 초월해 태평양 건너, 한반도에서 아득한 미국 동부 워싱턴이지만, 피비린내 나는 38선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국전참전공원에 선 장병들은 말없이 비를 맞았다. 차디찬 동상들이다.
 
한국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다. 장관은 헌화하고 묵념한 뒤 공원을 둘러봤다. 주미대사관 무관의 설명을 듣고는 소감을 밝혔다.
 
"군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했지만 전쟁이라고 하는 측면보다는 그야말로 뭔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바치는 그런 모습들이 잘 그려진 것 같아요."
 
전쟁을 모티프로 했지만 오히려 평화를 갈구하게 만드는 인상적인 조형이라는 것이다. 과거 이곳을 찾았던 국방장관이나 군 장성들의 소감과는 뉘앙스가 달랐다.류길재통일
"통일을 이루는 것이야 말로 이 사람들이 한 희생을 위해 할 수 있는 대가가 아닌가?" 되물었다. 묵념을 하면서는 "반드시 희생에 대한 대가를 통일로 갚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장관님!"
 
서울에서 간접적으로만 듣던 류 장관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촉촉한 분위기를 깨는 딱딱한 질문을 던지는 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어쩌랴!
 
"남북 관계가 많은 분들이 너무 꽉 막혀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데, 돌파구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이십니까?"
 
"그런 거창한 생각보다는 우선 얘기를 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 생각도 미국에 전달을 하고 미국 생각도 듣고, 허심탄회한 얘기들이 오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장관은 조심스러웠다. 본론으로 들어갔다.
 
"구체적으로 5.24 조치, 이산가족 상봉은 크게 봐서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5.24나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 간에 놓여 있는 현안이기 때문에 그런 현안들은 결국 남과 북이 대화 테이블에서 논의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대화가 열려서 그런 문제들도 논의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장관은 천안함 사건 뒤 대북 경제협력을 금지한 5.24 조치 해제 문제를 거론했다. 주고받기 아니냐는 일각의 시선도 있지만, 그 보다는 포괄적 해법으로 들렸다.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좀 더 깊숙이 찔러봤다.
 
"고위급 회담에 북한이 응하기를 계속 바라시는 거고 고위급 회담이 열리면 5.24 조치 해제 문제를 포함해서 다양한 문제를 일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고위급 접촉은 지난 10월에 하기로 했다가 결국 북측이 무산시켰고, 지금 당장 고위급 접촉이나 대화가 재개될 거라는 기대는 강하게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대화 희망은 '원론적인 차원'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대화 무산 책임론의 측면에서 본다면 “북이 좀 더 남북 관계에 진지하게 나올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대화 중단의 책임, 재개의 부담 - ‘공’이 북쪽에 있다고 보느냐 물었다.
 
"공이 뭐 북에 있다, 우리에게 있다 그렇게 얘기하기보다는 같이 좀 노력해야 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연대책임론’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노력론’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임기 말로 접어들고 박근혜 정부도 전환점을 맞는 지금 뭔가를 해야겠다는 속내가 인터뷰 내내 묻어났다.
 
다만 "계기를 만들고 관계를 풀더라도 제대로 가야지, 했다가 말다가 하면..."이라며 이왕 남북 관계 복원을 할 거면 탄탄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박근혜 정부의 트레이드마크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변형이 필요하다는 견해에 공감하느냐고 물었는데, 자신이 직접 들은 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2014년 한해를 마감해 가는 지금 워싱턴에는 '통통통'이란 말이 있다. 통일연구원장이 다녀갔고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들도 미국 정부 당국자들을 만나고 갔다. 책임 있는 당국자인 통일부 장관이 왔다. 이란 핵 협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국무 차관인 여걸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 조정관, 또 ‘북폭론’을 펴 실제와는 다르게 ‘매파’로 주목받은 애쉬턴 카터 국방장관 지명자까지 마음만 먹는다면 만날 사람은 많다.
 
새해 2015년 대한민국의 통일부 장관은 어떤 복안으로 북한을 대화로 이끌고, 또 관련국들의 지지를 끌어낼 것인가? 전진보다는 진전이 필요한 때다. 38선의 동쪽 끝 참전 용사들이 초겨울 찬비를 맞고 있는 워싱턴 방문은 그저 통과의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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