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은 푸르디 푸른 지중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수도 베이루트는 마치 그리스풍의 건물과 프라하의 붉은 지붕으로 유럽을 연상시키는 풍광을 가졌습니다. 베이루트는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로 한때 ‘중동의 파리’라고 까지 불렸습니다. 베이루트에서 동쪽으로 차를 몰고 가면 해발 1500미터의 산맥이 나옵니다. 굽이굽이 꺾긴 고갯길을 1시간 가량 넘으면 산맥 밑에 드넓은 초원지대가 나옵니다.
그 초원은 레바논 북쪽에서 레바논 산맥을 오른쪽에 끼고 남쪽으로 길게 뻗어있습니다. 레바논의 채소와 과일은 다 여기서 나올 정도로 토양이 실하고 곱습니다. 이 곳을 레바논 사람들은 베카밸리라 부릅니다. 베카밸리에서 산 하나를 더 넘으면 바로 시리압니다.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이후 110만 명의 시리아인이 이 산맥을 넘어 레바논으로 왔습니다. 그 중 60만 명이 베카밸리에 흩어져 삽니다.
이들을 우리는 난민이라고 부릅니다. 레바논에선 그저 시리아 방문객입니다. 레바논은 난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난민을 위한 캠프는 없습니다. 시리아 사람들은 알아서 살아야 합니다. 매년 시리아 사람들은 거주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베카밸리엔 시리아 난민이 처 놓은 천막촌이 수백 군데가 있습니다.
20~100개의 천막이 모여있습니다. 천막은 가로세로 5~7미터 크기의 성냥갑처럼 생겼습니다. 맨 땅에 시멘트를 부어 평평하게 다져놓은 뒤 나무로 뼈대를 세워 비닐막으로 덮은 게 답니다. 지붕은 혹시 바람에 날아갈까 폐타이어를 구해 올려놓은 집도 많습니다.
이 천막도 사유지라 시리아인은 1년에 4백~6백달러의 자릿세를 줍니다. 천막 내부는 용도에 따라 다르게 구성했습니다. 대개는 방 하나, 부엌 하나로 만들어놨습니다. 방바닥은 물론 시멘트 바닥입니다. 냉기를 막기 위해 카펫 한 장 깔아놓은 게 전부입니다. 창문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천막인지라 수도는 물론 하수시설도 없습니다. 오물은 그대로 천막촌을 둘러싼 도랑으로 흘러나옵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이는 많아도 치우는 이는 없습니다. 도랑은 쓰레기 반 오물 반입니다. 개의 사체로 나뒹굴고 있습니다. 악취가 진정하고 파리떼가 도랑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서 난민 아이들은 뛰어 놉니다. 대부분이 맨발입니다. 신어도 얇은 슬리퍼 정도입니다. 부르트고 긁히고 상처 나도 웬만하면 그냥 답니다. 침을 바르거나 휴지로 피를 닦는 게 익숙한 아이들입니다.
우연히 만난 갓난아기의 팔에 하얀 물감처럼 보이는 게 잔뜩 묻어 있습니다. 물감이 말라 굳어서 금이 가고 깨지듯 군데군데는 떨어져 나가 있습니다.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뭐죠?” “치약이에요.” “왜 치약을 발랐어요?.” “아기가 기름에 팔을 데였어요.” “병원에 안 가셨어요?” “병원에 가려면 3만리라(우리 돈 2만원)이 필요한 데 그럴 돈이 없어요.” 그 다음에 뭐라고 말해줘야 할 지 몰랐습니다. 아이는 낯선 사람이 자신의 팔을 만지는 게 싫고 아픈 지 그냥 울어댔습니다.
난민촌 주민들은 대개는 멀리 우물에서 물을 퍼오거나 사흘에 한 두 번씩 오는 급수차량에서 얻습니다. 씻을 정도로 넉넉한 사정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세수를 거의 안 합니다. 아니 못 합니다. 얼굴은 때가 가득합니다. 손과 발은 시커멓습니다. 옷은 며칠을 입었는지 모를 정도로 검게 때가 타있습니다. 위생이 걱정입니다. 지난 여름에 A형 간염이 난민촌을 휩쓸고 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가난하고 아이들은 늘 굶주립니다. 베카밸리에 도착한 첫 날 난민촌을 가서 본 첫 풍경은 황무지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캐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양팝니다. 그곳은 양파밭이었는데 수확을 마치고 미처 캐가지 않은 양파를 아이들이 캐고 있는 겁니다. 아이들은 우선 낯선 이방인과 그 이방인이 든 카메라가 신기한 듯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캔 양파를 자랑스럽게 보여줍니다. 왜 캤니?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먹기 위해서, 어머니한테 가져다가 요리를 해달라고 할 거랍니다. 다른 아이는 이걸 집 앞에 심어서 더 크게 자라면 먹겠다고 합니다. 양파 캐기는 양식을 얻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땅한 놀거리가 없는 난민촌 아이들에겐 나름 즐거움도 주는 놀이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 들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뒤로 하고 찾아간 천막에는 내가 취재하려는 형제가 삽니다. 12살 삭크르와 11살 아흐메드입니다. 두 형제의 가족은 24명이나 됩니다. 위로 누나 하나가 있고 나머지는 다 동생들입니다. 젖먹이 아기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세 명의 아내를 뒀습니다. 천막 두 개를 셋으로 나눠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순수했습니다. 큰 누나는 맨 뒤에서 수줍게 웃으면 손님을 맞이했고, 꼬맹이 동생들은 저를 마치 멀리서 온 친척 아저씨 대하듯 달려들면서 ‘우스테즈.. 우스테즈.. 쏘라 쏘라.. (아저씨 아저씨 사진요. 사진..)’ 라며 사진 찍어달라고 졸랐습니다.
형제의 가족은 시리아 이들리브에서 1년 전에 베카밸리에 왔습니다. 시리아 정부군의 학살을 피해 산맥을 넘어 탈출했습니다. 두 형제는 전쟁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학교 수업도중 준비물을 놓고 와 잠시 집에 다녀오는 사이 벌어진 일입니다.
학교가 정부군에게 폭격 당했습니다.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55명의 친구와 선생님이 숨졌습니다. 두 형제가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눈에 들어온 건 무참히 부서진 배움의 터와 피범벅이 된 교실이었습니다. 학교가 폭격을 당한 뒤 가족은 시리아를 떠났습니다.
<삭크르.아흐메드 형제의 대가족>
아버지는 농부였는데 베카밸리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여기저기 아프답니다. 더 묻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결국 제가 떠나는 날까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2살 11살 어린 형제가 아버지를 대신해 돈벌이를 합니다.
아이들에게 선뜻 일거리를 줄 곳은 거의 없습니다. 삭크르와 아흐메드는 매일 아침 7시면 학교를 가는 대신 수레를 끌고 집을 나섭니다. 수레는 나무 판에 유모차 바퀴 같은 걸 달아놨습니다. 그 위엔 플라스틱 박스 3개를 차곡 차곡 쌓아 만들었습니다. 형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수레를 끌고나간 형제는 베카밸리의 레바논 거주지의 쓰레기통을 뒤집니다. 그 안에서 플라스틱과 고철을 주워 챙깁니다. 음식물 쓰레기와 각종 오물로 채워진 쓰레기더미를 맨 손으로 뒤집니다. 손과 얼굴엔 파리떼가 자꾸 달라붙어도 할 수 없습니다. 손은 금세 시커멓게 더러워집니다.
두 소년은 별 말을 주고 받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쓰레기통을 뒤집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뭔가 쓸만한 고물을 찾으면 장난감을 주운 아이처럼 좋아라 웃습니다. 고물 줍는 일도 서둘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다른 아이들이 선수를 칩니다.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치고 들어와 매몰차게 쓰레기통을 비워가는 쓰레기수거차량도 소년에겐 경쟁잡니다.
<삭크르와 아흐메드 형제, 12살 11살 소년 가장들입니다>
이런 형제에 대한 레바논 주민의 시선을 곱지 않습니다. 쓰레기통뿐 아니라 여기저기 길거리나 공사장에서도 고철을 줍다 보니 도둑으로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동생 아흐메드의 오른쪽 귀에는 좁쌀만한 딱지가 가득 붙어있습니다. 어디 긁힌 상처인 줄 알았는데 불에 데인 상처랍니다.
어느 공사중인 건물에서 고철을 이것저것 주웠는데 그 건물을 지키던 경비가 쫓아와서 도둑질을 했다고 때렸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귀를 붙잡고 라이터불로 지졌다는 겁니다. 형제는 아파도 뭐라 말도 못하고 그저 울며 도망쳤다고 합니다. 고향 땅 시리아에서 잔인한 폭력을 피해 레바논에 왔지만 여기서도 형제를 기다리는 건 핍박과 오해, 그리고 또 다른 폭력이었습니다.
한창 쓰레기를 줍던 동생 아흐메드가 쓰레기통 옆에서 무엇인가를 베어 물고 있습니다. 이내 한조각 떼어서 형 삭크르에서도 나눠줍니다. 꼭꼭 씹어먹습니다. 집을 떠났을 때는 분명 빈 손이었는데? 그건 뭐니? 과자랍니다. 어디서 났니? 말없이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쓰레기통 옆에 버러진 상자가 있습니다. 누군가 먹다 버린 것이겠죠. 배고픔은 더러움도 잊게 만드는가 봅니다.
“학교 가고 싶지 않니?” “가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돈을 벌어야 해요. 그래야 빵을 살 수 있어요.” “꿈이 뭐니?” “돈을 많이 벌어서 가게를 갖고 싶어요.” “왜?” “먹을 거랑 갖고 싶은 게 많은 가게를 갖고 싶어요. 그래서 차를 사서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여기저기 여행하고 싶어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형제가 하루 종일 고물을 모아 번 돈은 우리 돈 1500원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맛난 끼니가 기다리는 건 아닙니다. 형제가 집에 와서 먹는 끼니는 쌀과 콩을 삶아 향신료에 버무린 맨밥이 전부입니다.
그마저도 10명의 형제와 함께 먹다 보면 금새 동이 나 버립니다. (엄마를 따라 아이들은 식사 때면 셋으로 나뉘어 각기 따로 먹더군요.) 정말 양이 적어서인지 아니면 아이들의 손놀림이 빨라서인지 순식간에 음식이 사라지더군요.
시리아 난민 가운데 절반은 어린이와 청소년입니다. 그 중 5명 가운데 4명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생계형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미래는 어떤 의미로 다가설까요? 참혹한 과거와 참담한 현재 보다 나아질까요?
‘잃어버린 세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후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층이나 예술파 청년들을 가리는 말인데, 요즘은 전쟁으로 절망과 허무에 빠진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쓰입니다.
과거에 당한 정신적 고통과 현재에 찌든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꿈도 희망도 없이 자라야 하는 시리아 난민 아이들이 성인으로 자라났을 때 어떤 모습이기를 사회는 바라고 있을까요? 난민의 절반이 어린이와 청소년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10년 뒤면 어떻게 자랐을까요?
그 많은 수의 아이들이 사회의 빈민층을 여전히 형성하고 있다면 시리아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내전이 끝나지 않아 시리아 난민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레바논의 미래는 어떻게 뒤바뀔까요?
전쟁은 아이들에게 가난과 절망, 허무를 안겼습니다. 그 아이들은 이대로 아무런 도움 없이 방치한다면 아이들은 언제가 자라나 어른들이 될 때 자신의 미래를 망가뜨린 사회에 어떤 고민과 숙제를 안길 지 모릅니다.
[월드리포트] 시리아 난민 취재기 ① 베카밸리를 택한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