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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육상선수는 타고나는가?

권종오 기자

입력 : 2014.10.13 10:00|수정 : 2014.10.13 16:07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육상은 은메달 4개, 동메달 6개를 따내는 데 그쳐 1978년 방콕 대회 이후 36년 만에 ‘노골드’의 수모를 겪었습니다. 10년 전에 제가 육상 종목을 현장에서 취재할 때 어떤 육상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상은 한마디로 팔자야. 타고나야 한다는 거야.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100m에서 우승할 수 없어.” 후천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육상이 팔자라는 말이 맞는 것일까요? 이번 아시안게임 육상의 꽃인 남자 100m와 200m는 카타르의 페미 오구노데가 휩쓸며 2관왕에 올랐습니다. 오구노데는 100m에서 9초93으로 아시안 신기록까지 세웠습니다. 그런데 오구노데는 원래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카타르에 귀화한 선수입니다. 나이지리아는 지역적으로 서부 아프리카에 속합니다.

 1980년대 단거리 슈퍼스타였던 미국의 칼 루이스와 캐나다의 벤 존슨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벤 존슨의 원래 고향은 우사인 볼트의 조국인 자메이카입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m 금메달리스트인 린포드 크리스티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100m 우승자인 도노반 베일리도 본래 자메이카 출신입니다. 자메이카는 인종적으로 주로 서부 아프리카(세네갈, 가나,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등)에서 건너온 사람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의 흑인 조상도 자메이카처럼 서부 아프리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인종에 비해 엉덩이가 좁고 백색 근섬유(속근)가 발달해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합니다. 100m-200m처럼 전력질주가 필요한 단거리 종목에 유리한 것이지요. 자메리카 사람들의 유전자를 분석하면 ‘액티넨A’라는 특이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이 조사 대상자의 70%나 됩니다. ‘액티넨A'가 있는 사람은 근육의 이완과 수축이 엄청 빠릅니다. 또 이른바 ‘파워 존’(Power Zone)이 다른 인종에 비해 엄청나게 강합니다. ‘파워 존’은 엉덩이뼈와 허벅지뼈를 잇는 고관절을 중심으로 배, 허벅지, 등으로 구성된 몸의 중심부를 말합니다. 아시안게임 남자 200m에서 2회 연속 우승을 달성한 왕년의 ‘아시아 최고 스프린터’ 장재근 SBS 육상 해설위원은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인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순간적인 가속도를 내는데 그 원동력은 파워 존이다”고 설명합니다.     

 단거리 종목이 서부 아프리카계 혈통을 가진 선수의 독무대라면 장거리 종목은 동부 아프리카계 천하입니다. ‘맨발의 마라톤 황제’였던 에티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를 비롯해 몇 십 년 동안 수많은 장거리 스타가 대부분 에티오피아, 케냐, 소말리아 등 동부 아프리카에서 나왔습니다.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5천m와 1만m를 석권한 영국의 모하메드 파라는 원래 소말리아 출신 흑인입니다.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 남녀 마라톤은 모두 바레인 선수들이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남녀 마라톤 우승자들은 원래 아프리카 케냐 출신으로 바레인으로 귀화한 선수들입니다. 동부 아프리카인들이 장거리 종목에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운동 생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다른 인종보다 적색 근섬유(지근)가 매우 발달해 오래 달리기에 뛰어납니다. 이 가운데 특히 장거리에 강한 종족이 케냐 북부에 사는 ‘칼렌진족’입니다 이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랐으며 적색 근섬유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게다가 해발 2천m 이상의 고지에 거주하고 있어 심폐지구력이 탁월합니다.

 그럼 800m와 1,500m 같은 중거리 종목은 어떨까요? 여기서도 아프리카계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단거리와 장거리처럼 절대 강세는 아닙니다. 아시아와 유럽의 다른 인종 선수들도 충분히 파고들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육상에서 단거리와 장거리 종목의 기록이 유전적인 요소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수한 인재를 조기에 발굴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육성한다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선수도 올림픽에서 아프리카계 선수를 꺾는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110m 허들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중국의 육상스타 류샹이 극명한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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