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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계 캐나다 여성 "어머니는 침묵했지만 나는 끝까지 싸울 것"

입력 : 2014.08.25 08:03|수정 : 2014.08.25 15:19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입을 닫았지만 저는 끝까지 싸워나갈 겁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해결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어머니와 이모가 일본군의 성노예였다는 사실을 폭로한 네덜란드계 캐나다 여성인 테인 비젠버거 반 데르 왈(73) 여사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가족사'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악행을 바로잡지 않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그냥 덮고 가는 것은 미래세대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

현재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거주하는 반데르 왈 여사는 24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서면인터뷰에서 "일본군들이 저지른 행동은 짐승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며 "여생을 일본군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기록하고 싸우는데 바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반데르 왈 여사 가족이 당시 네덜란드령이었던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 터를 잡은 것은 1930년대 후반 네덜란드 군인이었던 부친이 발령을 받은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1938년 부모가 결혼해 처음 정착한 곳은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섬의 반둥 지역이었습니다.

1941년 반데르 왈 여사가 태어날 때만 해도 가족은 단란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침공하면서 가족의 일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부친은 악명높았던 '버마 철교' 건설현장에 끌려가 강제노력을 해야 했고 과로와 영양실조를 견디지 못해 이듬해 사망했습니다.

자바섬 동쪽 수라바야 지역으로 도피해있던 어머니 시스케 반 데르 왈과 이모 에케 반 드리엘-시츠마는 일본군에 이끌려 문틸란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이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이모는 일본군 성노예로서의 비극적 생활을 겪어야 했습니다.백인 위안부
다음은 반데르 왈 여사와의 일문일답입니다.

-- 어머니와 이모가 어떻게 일본군의 성노예로 전락하게 됐나.

▲어느 날 일본군이 자신들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수용소 내의 성 사비에르 성당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강간의 희생양이 됐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일본군들에게 어머니는 자신들의 소유재산이었다. 어머니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많이 강간을 당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어머니는 항상 성당에서 나올 때 계단에서 기다리던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냥 넘어졌다고 했다. 그러고는 성당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모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살을 시도하다가 어머니의 제지로 살아남았다.

-- 어머니와 이모 외에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었나.

▲1944년 1월 일본군 헌병대가 오더니 수용소에 있던 어리고 젊은 여성들을 골라 성당으로 끌고갔다. 목적은 다른 수용소의 위안부로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수용소 지도자들과 의사들은 (전쟁포로와 부상자, 민간인 등을 보호하도록 한) 제네바 국제협약 위반이라고 항거했지만 무시당했다. 헌병대가 성당 안에서 여성들을 조사한 뒤 성당 밖에 있던 버스로 끌고나가면서 폭동이 일어났다. 수용소에 있던 여성들이 흙과 돌을 헌병대에게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고 헌병대는 칼로 비무장 상태의 여성들과 아이들을 베었다. 어머니는 여기에서 제외됐지만 뽑힌 여성들은 자바주 마겔랑 수용소라는 곳으로 끌려가 위안부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 어머니와 이모는 일본군에게 당한 일을 끝까지 숨겼나.

▲어머니는 2003년 돌아가실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1996년 돌아가신 이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부끄러운 과거를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과거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아픔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오히려 어머니는 나에게 당시 수용소 생활을 최대한 재미있게 얘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전쟁은 끝났지만 어머니에게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수년간에 걸쳐 한밤중에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악몽을 꿨다'고만 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릴 적 잠시 어머니와 이모가 하던 얘기를 우연히 엿들었던 생각이 난다. 두 사람이 일본군들이 저지른 끔찍한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공포극 얘기를 하는 줄로만 알았다.

-- 나중에 어떻게 알게 됐나.

▲어미니와 이모는 네덜란드로 돌아온 뒤 막내 이모에게만 이 사실을 얘기했고 막내 이모도 이를 평생의 비밀로 지켰다. 막내 이모는 언니들이 일본군의 성노예였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2003년 돌아가시고 난 뒤 나는 편지와 사진들이 담긴 행랑을 발견했다. 과거 인도네시아에 살던 행적을 담은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발견하고는 왜 이렇게 비밀이 많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졌다. 2009년께 내가 가족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고 했을 때 막내 이모는 사실을 털어놨다. 막내 이모는 88세이고 지금도 건강하시다.

-- 어떻게 캐나다로 오게됐나.

▲전쟁이 끝난 뒤 어머니와 나는 1946년 4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한마디로 태어나지 않은 아이였다. 인도네시아 반둥이라는 도시자체가 붕괴되면서 출생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나중에 결혼하려고 할 때 문제가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세사람을 찾아야했으나 대부분 죽거나 다른 나라로 가버린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필요한 세사람을 찾았고 그후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후에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됐다.

--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나.

▲일본군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저지른 악행들을 기록하고 일본이 잘못을 바로잡도록 계속 싸울 것이다. 일본이 저지른 악행들은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일본은 나의 유년기를 앗아갔고, 어머니를 강간했으며, 아버지를 죽도록 만들었다. 일본군은 짐승보다도 더 나빴다. 야만적인 일본 군인들은 즐기기 위해 강간을 했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는 아무런 적개심이 없다. 다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는 일본 정부에 화가 난다. 일본 정부에게 '부끄러워할줄 알라'고 말하고 싶다. 미래 세대에게 매우 나쁜 선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서 어떻게 지도적 국가가 될 수 있는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다. 내가 일본 정부에게 원하는 것은 과거 일본군이 어린 소녀와 여성들에게 악행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이 파괴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언젠가 일본 정부도 이를 부인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다.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있는 전쟁영웅들을 계속 신성시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신사에는 피의 살인자들이 많다. 또 일본은 일왕이 신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일왕은 무고한 여성과 아이들까지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괴물(monster)이나 다름없다.

--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있는가.

▲일본군에 의해 고통을 겪었던 한국 여성들은 매우 용기 있게 이 문제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나는 한국 여성들의 참을성을 존중하고 일본 정부에 대해 과거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지금의 입장을 계속 유지해줄 것을 촉구한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악행을 저지르고도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SBS 뉴미디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