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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폐하, 성하는 되고 각하는 안 되고?

권종오 기자

입력 : 2014.08.04 09:24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는 14일 4박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그동안 교황에 대한 존칭으로 ‘교황 성하’라는 단어를 써왔습니다. 교회뿐만이 아니라 정부도 공식 문서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1963년 10월 요한 23세가 선종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교황 성하’라는 표현을 쓰며 애도했습니다.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환영사에서 역시 ‘교황 성하’라는 존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럼 ‘성하’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과거 왕조 시대에 황제를 ‘폐하’(陛下)라 불렀습니다. ‘폐’(陛)는 궁궐에 있는 섬돌입니다. 즉 섬돌 아래에서 우러러 봐야 할 높은 분이란 뜻입니다. 반대로 해석하면 섬돌 위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존귀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어찌됐든 폐하는 계급적으로 ‘높은 분’이고 ‘폐하’라는 존칭을 사용하는 자는 ‘아랫 사람’이 됩니다. 조선 시대 왕들은 황제가 아니라 제후국의 통치자였기 때문에 ‘폐하’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보다 한 급 낮은 ‘전하’(殿下)라 불렸습니다. 그보다 더 아래가 ‘합하’(閤下)-‘각하’(閣下)-‘귀하’(貴下)입니다. ‘성하’(聖下)는 영어의 ‘His Holiness'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만든 조어입니다.  굳이 해석하자면 ‘성스럽게 우러러 봐야 할 높은 분’이란 뜻입니다.

‘폐하’는 분명 신분계급 관념이 철저했던 왕조시대의 유물입니다. 하지만 신분제가 폐지된 20세기는 물론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지금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984년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은 만찬사에서 히로히토 당시 천황을 가리켜 ‘천황 폐하’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2013년 11월 영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주최한 국빈만찬에서 영어로 답사를 했지만 국문 번역본에는 ‘여왕 폐하’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일본 천황은 영어로 ‘Emperor’, 영국 여왕은 ‘Her Majesty The Queen'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Emperor’와 ‘Majesty’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우리말로 ‘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언어 사용의 논리적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폐하’와 그로부터 파생된 ‘성하’란 단어가 분명 구시대적이고 권위적인 말이지만 그것이 관례적으로 사용돼 왔고 다른 말로 대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슷한 범주인 ‘각하’라는 말은 왜 굳이 피하고 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각하’는 원래 대통령, 고위 관료, 고위 장성에 대한 존칭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통령에 대한 존칭으로만 사용돼 왔습니다.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건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다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후에는 비공식적으로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각하'란 단어가 풍기는 느낌이 너무 권위적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호칭은 ‘대통령님’으로 대체됐습니다. 권위적이란 면으로 따지면 ‘각하’보다는 ‘폐하’와 ‘성하’라는 표현이 훨씬 더 권위적입니다. '각하'는 안 쓰면서 '폐하' '성하'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한마디로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준비위원장인 강우일 주교는 ‘교황’(敎皇)이란 말 대신에 ‘교종’(敎宗) 즉 ‘교회의 으뜸 사제’란 뜻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황’이 ‘황제’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황제란 뜻의 ‘교황’도 권위적인데 여기에다 ‘성하’란 표현까지 쓰는 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폐하’, ‘성하’ 같은 권위주의적 용어는 지금부터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왕 폐하’ 대신 ‘여왕’,  ‘교황 성하’ 대신 ‘교황’이란 표현만으로도 존칭의 역할은 충분히 합니다. 이미 16년 전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 각하’라는 표현을 폐지한 우리가 굳이 다른 나라의 인물에게만 꼬박꼬박 ‘폐하’ ‘성하’를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우리가 습관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는 존칭에 대해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