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면 오히려 그 의미가 왜곡될 수 있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느끼는 대로 봐주시면 됩니다"
영화 '경주'를 연출한 장률 감독은 마치 영화 속 이야기처럼 속을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겼다. 최현과 윤희의 과거, 두 사람의 관계, 마지막 장면의 의미 등 보는 이에 따라서 다소 불분명하게 여겨질 이야기에 대해 감독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우리네 인생이 명확하게 결론 내지지 않듯, 최현과 윤희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장률 감독은 영화 '경주'로 대중 앞에 한발 가까이 섰다. '경계', '이리', '두만강', '풍경' 등의 작품에서 대사도 음악도 최소화하며 극도의 절제된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그가 '경주'에서는 한 남녀의 1박 2일을 시종일관 생동감 넘치게 그렸다.
이 영화는 감독의 실제 경험담이 투영됐다. 장률 감독은 "지난 1995년에 처음 한국에 왔고, 지인의 안내로 경주 여행을 갔다. 그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리솔'이라는 찻집에 들렀고, 춘화를 봤다. 이후 최현(박해일 분)처럼 지인의 장례식차 한국을 다시 찾았고 경주를 한번 더 갔는데 춘화는 없어지고 주인도 바뀌었더라.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금의 '경주'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혔다.

장률 감독은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로 이주한 후 태어난 재중교포 3세다. 그는 전작들에서 한국계 중국인, 탈북자, 몽골인 등 경계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봤다. 그의 작품에서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늘 공간에서 인물을 떠올리고 이야기를 출발시키기 때문이다.
"사람은 공간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 그 공간에서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공간에 사람이 머물 때 느껴지는 온도가 있다"면서 "나는 영화에서 공간이 안 보이면 불안하다. 그런 사람은 영화 속에서만 사는 느낌이라...관객은 스크린 안에서 감독이 어떤 공간을 주는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감독은 관객이 그 공간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경주는 그에게 어떤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일까. 그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특별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살고있는 공간 인근에 이렇게 많은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중국에서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보통 무덤을 싫어하는데 경주는 사람과 무덤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능이 놀이판이 되고 연애판이되기도 한다. 처음에 경주를 봤을 때 무척 놀라웠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경주'는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 분)이 지인의 부고 소식을 듣고 한국에 온 뒤 경주를 찾는 1박 2일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최현은 '아리솔'이라는 독특한 분위기의 전통 찻집을 방문해 그 옛날 깊은 인상을 남긴 춘화를 찾는다. 그러나 춘화는 사라지고, 대신 찻집 주인 윤희(신민아 분)과 특별한 하루를 보낸다.

이 과정에서 최현은 자신도 몰랐던 자신을 돌이켜보고, 윤희는 최현과의 만남을 통해 떠나간 사람을 떠올린다. 이들의 우정과 사랑도 아닌 묘한 감정을 나눈다.
영화 후반부 최현은 윤희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린다. 감독은 이에 대해 "남녀 관계가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순간에 접어들 때가 있다. 최현은 술도 마셨고, 윤희의 집에 초대도 받았지만 그 곳에서 남편의 이야기도 들었고, 영민도 찾아왔다. 순간순간 감정이 깨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가 최현의 발걸음을 막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주'는 아름다운 롱테이크로 마무리된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롱테이크 샷은 빈번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롱테이크는 시간이다. 그 연속적 시간 안에서 공간과 사람의 관계를 담으려한다. 잘 표현됐다고 하면 다른 컷으로 넘어가고 아니면 머문다. 인물의 감정에 따라 롱테이크가 필요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기도 한다"고 롱테이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전작과 비교하면 한층 대중적인 영화라는 평가에 대해 장률 감독은 "한국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 않은가. 아무래도 앞의 영화들보다는 친숙한 공간이라 그럴 것이다. 또 무엇보다 대중에게 친숙한 배우들이 나오니 대중적이라고 느끼시는 것 같다. 하지만 전작도 그렇고 '경주'도 그렇고 나는 늘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률 감독은 자신을 '시네아스트'로 칭하는 것에 대해 "그저 나는 영화 몇 편을 찍은 사람일 뿐이다"라고 겸손해했다. 그는 여전히 영화를 찍고,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조용히 묵묵히 자신만의 영상 세계를 확장해가고 있는 장률 감독에게 '거장'이라는 수식어는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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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현철 기자, 영화 스틸컷>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