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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日 '성능 좋은 녹음기' 외교…한국 "말 못해" 외교

심석태 기자

입력 : 2014.04.09 09:27|수정 : 2014.04.09 14:03

실수 무서워 외교관이 할 말도 못해서는 외교 무대 주인공 못 돼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막무가내식 행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A급 전범들을 합사해놓은 야스쿠니 신사를 총리가 참배한 것이 아베가 처음도 아니지요. 1978년 A급 전범 14명을 야스쿠니에 합사한 뒤로 나카소네 전 총리가 처음 공식 참배했고 하시모토, 고이즈미가 뒤를 이었습니다. 고이즈미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무려 6차례나 참배했습니다. 이번 아베의 참배는 현직 총리로서는 7년 만입니다. 물론 비공식 참배까지 합치면 더 많습니다만.

하지만 지난해 아베 총리의 참배가 특히 관심을 끈 것은 한중일 3국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3국간 정상회담을 비롯한 고위급 채널이 모조리 막혀 있는 상태에서 사태를 더욱 경색 국면으로 몰고 가는 선택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상 아베 총리 재임 기간에는 더 이상 한일, 중일 또는 한중일 정상회담은 물 건너 갔다는 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교장관 차원을 비롯한 각종 장관급 회담도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아베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주요 인사들은 위안부는 어디에나 있었다거나, 위안부는 매춘부라거나, 난징 대학살은 거짓말이라는 식의 막말을 거리낌 없이 내놓고 있습니다. 교과서 문제도 마찬가지죠. 이런 와중에 일본 외교부를 방문한 한중일 3국 기자들은 과연 외교부 고위 당국자들이 어떻게 이런 상황을 설명할 것인지 관심이 컸습니다.

한중일 기자단 만난

민감한 쟁점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일본 외교부에서는 비교적 고위 인사들이 줄줄이 나서서 3국 기자들에게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기하라 세이지 정무관이었습니다. 중국 외교부가 3국 기자단 면담에 부국장을 내보낸 것과는 달리 차관급 고위 인사가 직접 나선 겁니다. 야스쿠니 참배, 위안부 문제 같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 기존의 일본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다만 성실하고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특히 야스쿠니 참배는 개인적 결단에 따른 것으로 앞으로 간다, 안 간다 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지금까지 공식 비공식적으로 일본 총리가 스무 번 정도 야스쿠니를 참배했지만 한국과 중국은 그때그때 국내 사정을 감안해서 반응을 보여왔다면서 오히려 한중 양국이 국내 정치에 야스쿠니 참배를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가나스기 겐지 외교부 아시아대양주국 심의관 나섰습니다. 중국과 같은 부국장 급입니다. 현역 의원인 정무관과 달리 32년째 직업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다는 가나스기 심의관은 역시 똑같은 질문들에 대해 더욱 차분한, 그러나 거의 동일한 대답을 했습니다. 다만 답변 곳곳에 문제를 계속 관리, 해결해야 하는 직업 외교관으로서의 고민이 묻어났습니다.


일본 외교부 가나스

예를 들어 정치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정부에 따라, 개인에 따라 그때그때 하는 것이므로 직업 외교관들이 논평할 일이 아니라면서 다만 민주당 정부 때는 정부 관계자로서 참배한 사람은 없었다며 우파 정치인들을 살짝 꼬집기도 했습니다. 또 공식적으로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법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이지만 개인적 의견임을 전제로 이미 이 문제는 한일, 한중 양자간 문제가 아니라 미국,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가 거론하고 있는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만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중일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정상을 비롯한 고위 당국자들이 만나서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해야 하는데 그런 대화가 막혀 있는 것이 3국 관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고 은근히 화살을 정상회담을 거부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에 돌리기도 했습니다. 3국 정상이 만날 수 없는 조건을 조성하는 일본 측 문제보다는 이를 이유로 정상회담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더 문제라는 식으로 들렸습니다. 특히 한일 외교부 국장급 회담조차 의제 문제로 언제 열릴 수 있을지 전망이 서 있지 않으며 쟁점은 일본은 모든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자는 것이고 한국은 위안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룰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특히 한중일 3국 기자들을 상대로 일본이 1993년부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취했던 조치들과 한일간 협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한국 정부가 기존의 입장을 자꾸 뒤집는 바람에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 정부와 어떤 합의를 한들 한국 정부가 자국 국민들을 잘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기시다 일본 외교장

마지막으로 3국 기자들은 기시다 외교장관의 일본 기자클럽 초청 회견장을 방문해 직접 한중일 3국 갈등에 대한 외교 장관의 발언을 들을 기회도 가졌습니다. 내용은 동일했는데, 인상적인 것은 회견장을 찾은 일본의 원로 기자들을 상대로 기시다 장관이 야스쿠니 참배 같은 민감한 문제에 대해 외교 장관으로서 세계 각국에 일본 정부의 입장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입장에 있다고, 다시 말해 외교 장관으로서의 임무가 참배 등에 자신이 동의하는지와는 별개의 일이라고 선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한중일 3국간 대화를 끌어내야 하는 외교장관으로서 최소한의 성의가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이어서 3국 기자단은 마지막 방문국으로 한국으로 와서 한국 외교부를 방문했습니다. 한중일 3국협력 사무국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던 신봉길 동북아협력대사를 1시간 넘게 면담했습니다. 일본 외교부에서와 같이 실무 부서장인 동북아협력팀장이 배석했습니다. 면담에 나선 당국자의 직급으로 보면 차관급이 직접 면담에 나선 일본보다는 낮지만 부국장이 나선 중국에 비해서는 고위직이 나선 셈입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주로 한국 기자들이 활발하게 질문을 벌였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주로 일본 기자들이 많은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한국 외교부에서 취

그런데 정말 특이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동북아 협력의 필요성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동북아평화협력 구상 같은 추상적인 정책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을 한 뒤 일본의 집단 자위권 문제나 한중일 정상회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자신도 이런 문제는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고 있으며 해당 문제의 담당자가 아니어서 답변을 할 수 없다, 이런 문제는 대변인이 얘기해야 할 일이라는 식으로 피해갔습니다.

더구나 담당 국장을 함께 나오게 하려 했으나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해당 국장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특히 나오면서 민감한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나왔다는 말까지 해서 참석한 3국 기자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도쿄신문 기자의 집단자위권 관련 질문에는 ‘최근 행사 범위를 일본 영토 내로 한정하는 쪽으로 논의되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가 ‘지구 반대편까지 가는 건 아니라는 논의가 있다’는 반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도무지 ‘협력은 중요하다’는 당위론 외에 협력의 현실적 장애가 되는 현안들에 대해서는 전혀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3국 기자들을 만난 겁니다.

한국 외교부에서 취

동북아협력대사라는 직책은 한일 간의 민감한 현안을 직접 다루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이런 질문에 보도를 전제로 답변하지 않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미 중국과 일본 외교 당국자들을 만나고 온 한중일 3국 기자들에게 현안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당국자를 당연히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한국 외교부는 이미 그 전날까지 이번 프로그램에 참석한 한국 기자들을 상대로 중국과 일본에서 논의된 내용과 두 정부 당국자들의 설명에 대해서까지 ‘취재’를 끝낸 상태였습니다. 예상 문제를 알고 준비해 나온다면 가장 잘 준비된 답변을 할 수 있는 상태였는데 시험 거부라는 의외의 선택을 한 겁니다. 일본 기자들은 특히 이런 한국 외교부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며 일본으로 돌아가면 이번 해프닝에 대한 기사를 쓰겠다고 하더군요.

이번 한중일 3국 기자들의 공동 취재를 주관한 3국협력사무국, 즉 TCS는 3국 외교부가 관장하고 있습니다. 3국 외교부가 순차적으로 사무총장을 지명하고 사무총장을 맡지 않는 다른 두 나라의 현직 외교관이 사무차장을 맡습니다. 또 직접 외교관을 한 명씩 보내 팀장을 맡기고 그 아래에서 실무를 보는 그야말로 실무자인 연구원들만 TCS가 직접 채용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국 조약에 따라 설립된 국제기구인 만큼 앞으로는 직접 채용한 직원들의 역할이 더 커지겠지만 출범한 지 3년도 안 된 지금은 거의 3국 외교부가 사실상 공동 운영하는 기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구가 실시한 첫 공동 취재 프로그램인데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좋은 기회로 활용한 반면 한국은 그저 덕담만 하고 넘기려 한 겁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우리 외교 당국이 중국과 일본 정부에 비해 논리적으로 덜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적어도 사실적 측면에서라도 적극적으로 설명할 자신감이 없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습니다.

상대를 설득하지 못하는 말을 아무리 반복한들 소득은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성의를 다해 설명하다보면 의외의 성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이 잘 모르던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면 상당한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팩트 앞에 약한 기자들에게는 그렇습니다. 상처를 자꾸 들추는 것보다는 아예 입을 다무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질문을 피하는 건 어떤 경우에도 명분이 없어 보입니다. 일본 당국자들이 자신 있게 한국 정부가 지금까지 말을 바꾸고 입장을 뒤집고 있다고 말하고 한국 당국자들은 질문을 회피하는 모습을 본 일본 기자들이 어떤 느낌을 갖고 일본으로 돌아갔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번 공동 취재를 마치면서 든 우리 외교부에 가장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한중일 세 나라의 기자들이 공동 취재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최대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민감한 현안들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고 때로는 치열하게 토론까지 하면서 세 나라 사이의 갈등 완화에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건 큰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기자들은 이번 공동 취재 과정에서 한국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많이 바로잡을 수 있었다면서 일본 언론에 한일 관계와 관련해 충분한 언론 보도가 이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자국의 시청자, 독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두 나라의 시청자, 독자들까지 의식하면서 기사를 쓰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함께 했습니다. 중국 언론을 보는 시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정부 차원의 교류가 힘들수록 민간 차원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참여한 기자들이 모두 공감한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