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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위대한 정신의 승리…"노예12년"을 책으로 읽는다

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

입력 : 2014.03.09 07:17|수정 : 2014.03.09 07:17


영화 '노예12년'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많은 언론에 크게 실렸다. 한 달 좀 넘지 않았나 싶은데, 노예12년 ‘책’이 배달되어 왔다. 읽어봐야 할 다른 책도 많아서, “그냥 나중에 영화로 볼까” 하고 망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단 책장을 펼치고 나자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이자 화자(話者)인 솔로몬 노섭이 겪은 팔자가 기구해서가 아니다. (물론 기구한 인생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유인으로 살던 사람이 납치되어 12년간 노예로 살다니. 말이 되는가.) 읽는 동안 솔로몬 노섭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고귀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인지, 얼마나 지적인 인물인지 생생하게 느껴져서, 그가 겪은 일들의 비극성이 더욱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인칭 시점으로 기록되었다. '나는'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뉴욕 주에서 자유민으로 살던 시절부터, 수도 워싱턴 DC에 일자리를 구하러 갔다가 납치되고, 이후 노예로 처참한 삶을 살다 극적으로 구출되어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서술해 나간다.

그 서술의 태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하다. 자신에게 그런 고통을 안긴 사람들의 영육을 부수어 즙을 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노섭은 처음부터 끝까지 객관적인 톤을 잃지 않는다. 죽을 고비를 예사로 넘기는 노예생활의 처절함을 자세히 묘사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기록을 이어나간다.

자신이 겪은 '주인'들에 대한 인물평을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인간성을 형성한 사회와 제도의 문제도 짚는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돼 노예제 폐지 여론 형성에 기여했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이런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노섭은 1808년생으로, 1841년 납치되어 노예가 되었다가 1853년 구출되었다. 해리엇 비처 스토우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1852년에 출간되었다.)
노예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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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노섭은 노예 주인이라는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래는 본문 중에서 인용)

“노예 소유자가 잔인한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며, 오히려 그가 몸담고 있는 체제의 잘못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습과 사회의 영향을 이겨내지 못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채찍은 노예의 등을 후려치라고 있는 것이라고 배우기 때문에, 그는 성장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 쉽지 않게 된다.

비인간적인 주인들이 있는 것처럼, 인간적인 주인도 있을 것이다. -헐벗고 반쯤 굶주린 노예들이 있는 것처럼, 잘 입고 잘 먹고 행복한 노예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목격한 그런 부당함과 비인간성을 용인하는 제도는 잔인하고 불공평하고 야만스런 제도이다.” (인용 끝)


* * *
솔로몬 노섭은 노예생활 12년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해 여러 차례 극단적인 경험을 한다. 나쁜 인간을 만나 몇 차례나 죽을 뻔 했고, 그 때마다 착한 인간을 만나 목숨을 건졌다. 주인의 변덕과 탐욕 때문에 곁에서 목숨을 잃거나, 잃을 뻔한 노예들도 여럿이었다. 그런 참담하고 부당한 일을 12년이나 겪고 나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해 이렇게 객관적인 통찰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위대한 정신과 맑은 영혼의 소유자인가.

솔로몬 노섭은 또한 대단히 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남부 주의 노예 관련 법제, 노예를 이용한 농장의 생산 시스템 등을 상세히 설명한다. 노예들은 몇시간 동안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음식을 먹는지, 언제 휴가를 허용받고 언제 매를 맞았는지,  어떤 법률과 자연 환경 때문에 노예들이 탈출하여 남부를 벗어나기 어려웠는지,  마치 인류학자가 관찰하듯 상세하고 알기 쉽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덕분에 이야기는 보다 생생해지고, 픽션보다 더욱 픽션같은 스토리는 감동이 배가된다.

그는 많은 경우 백인 주인집을 포함해 그 농장에서 가장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 사람이었고, 농장 전체의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해 주인에게 돈을 더 벌어줄 만큼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못 배운 흑인이라고 해서 노예생활을 해도 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지만, 주인공이 이토록 지적이고 인격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노예제의 비극성을 증폭시킨다.

책의 말미에 가면, 결국 노섭은 착한 백인의 도움을 얻어 고향인 북부 뉴욕주에 소식을 전하는 데 성공한다. 12년전 납치되어 남부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는 비밀 편지가, 노섭 가문의 후견인 역을 하는 유력 백인 정치인 헨리 B.노섭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노예12년
헨리 B.노섭 선생이 급거 남부로 달려와 솔로몬을 구하는 과정은 손에 땀을 쥐는 긴장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긴박한 상황의 묘사에 그치지 않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어떤 법규에 따라 헨리 선생이 남부의 사법당국에 솔로몬의 구출을 요구하는지, 어떤 절차를 거쳐 솔로몬을 납치했던 인신매매상들을 검거해 법정에 세우는지가 소설같은 사건 전개와 함께 설명된다.

그리하여 160년 뒤 이역만리 땅에 사는 우리는, 미국의 노예제가 어떤 ‘시스템’이었는지를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책 말미에는 뉴욕주의 자유시민이 납치되어 노예가 되는 - 솔로몬 노섭이 당한 것과 같은- 사태를 예방하고 피해자를 구출하기 위한 법률, 솔로몬이 자유민임을 법정에서 입증하고, 법 절차에 따라 그를 뉴욕주로 데려오기 위해 쓰인 각종 서한이 부록으로 실려있다. 이 부분을 읽어보는 것은, 법 제도와 사법 절차라는 것이 인간의 자유를 지키는 데에 있어 어떤 힘과 한계를 갖는지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된다.

“노예12년”은 이미 저작권이 만료된 책이어서, 나에게만도 3종의 번역본이 배달되어 왔다. 나는 가장 먼저 받은 것이 새잎출판사의 책이어서 그것으로 읽었다. 글항아리와 열린책들에서 나온 버전도 나중에 받아 몇 장 훑어보았는데, 읽기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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