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강철보다 100배나 강하고, 구리보다 전기가 10배나 잘 통하는 물질이 있습니다. 신축성이 뛰어나 잡아 늘려도 안전하고, 구부리면 전기가 흐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뛰어난 성질을 갖고 있어 활용 잠재력이 막대하지만, 연필 한 자루와 스카치테이프만 있으면 쉽게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안드레 가임 교수팀이 처음 분리해 낸 그래핀(Graphene)입니다. 그래핀은 탄소(Carbon) 원자들이 벌집 모양 같은 6각형의 구조로 그물처럼 연결된 물질입니다. 가임 교수팀은 연필심의 재료인 흑연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내는 간단한 방법으로 그래핀을 얻어냈습니다. 스카치테이프의 접착력을 이용해 흑연에서 얇은 원자층을 살짝 벗겨내는 이 방법은 지금도 그래핀을 얻는데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됩니다.
이렇게 얻은 그래핀은 그 특이한 물성을 태양전지나 휘어지는 디스플레이, 투명전극이나 고강도소재, 투명전극과 센서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핀의 물성에 대한 연구가 더 진전되면 훨씬 더 넓은 분야에 응용이 가능할 전망입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서울대와 성균관대 연구팀이 각각 그래핀을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 상용화의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래핀을 전자소자에 응용해 개발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극도로 얇은 하나의 원자층으로 이루어진 그래핀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 새로운 소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래핀이 2차원 평면(단원자층) 안에서 소자를 구성하는 다른 물질과 만나서 접합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탄소 원자로만 이뤄진 그래핀 그 자체만으로는 응용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문제는 상용화에 결정적인 난관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인 과학자가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 1월 10일자에 이 문제를 해결한 논문을 실었습니다.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박제욱 박사 연구팀은 가볍고 열에 안정적인데다 전기절연성도 높아 '하얀 흑연'이라 부르는 질화붕소(Hexagonal Boron Nitride)라는 신소재를 그래핀과 나란히 붙여 성장시키고, 이를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을 이용해 원자 수준에서 직접 관찰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습니다. 학계에서 'h-BN’이라 부르는 이 물질은 그래핀과 '그물'의 격자 크기와 구조가 비슷한데다 세라믹이나 열전도 소자 등에 폭넓게 활용되는 신소재입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그래핀과 h-BN, 두 유망한 신소재가 평면 내에서 어떤 경계를 이루며 만날지 다양한 이론적인 예측을 내놓고 있었습니다.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뛰어난 두 신소재를 접합시킴으로써 지금까지는 불가능했던 획기적인 신소재와 제품의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이번 박제욱 박사 연구팀의 기술은 이 난제를 깔끔하게 풀어냈습니다. 지금까지 기존의 신소재 개발이 3차원 공간에서 서로 다른 원자들을 이리저리 여러 층 쌓아올려 만들어 내야만 했다면, 이제는 2차원 평면 내에서 성질이 서로 다른 두 물질을 원자 수준에서 직접 붙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래핀 연구의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저차원계 물리현상을 원자 수준에서 관찰하는 기반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는 평갑니다.
원자와 원자의 결합은 비유하자면 '레고 블록'을 연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레고 블록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물건, 예를 들어 반도체 칩과 같은 입체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바탕에 블록(원자들)을 정렬시키기 위한 판(실리콘 기판)이 필요하고, 그 위에 각각의 블록의 요철을 맞춰 한 층 한 층 쌓아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에피택시얼 성장 기법(Epitaxial Growth Technique)’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번 논문의 핵심은 서로 다른 물질을 층층이 높이 쌓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물질이 2차원 평면 안에서도 나란히 열 맞춰서 성장할 수 있게 한 기술입니다. 연구팀은 여기에 '2차원 헤테로에피택시(2D Heteroepitaxy)'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금까지 반도체의 기반이 되어왔지만 이제는 조금씩 한계를 드러내는 실리콘 기반 소자기술에 얽매이지 않고, 실리콘을 대체할 차세대 물질에 활용할 수 있는 기반 기술인 셈입니다.
전문가들이 21세기의 가장 '핫(Hot)한' 신소재로 꼽는 그래핀은 2015년쯤 처음 상용화돼 기존의 반도체와 금속 재료들을 대체하면서, 오는 2030년쯤에는 600조 원에 이르는 거대 시장으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과학 강국들은 앞을 다퉈 이 상용화의 문에 첫 발을 들여놓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도 그래핀 상용화에서 꾸준히 고무적인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통일도 '대박'일 수 있겠지만, 21세기 지식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대박'은 이제 그래핀에서 막 시작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