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에서 2시간을 달려 리치먼드에 도착했다. 버지니아 주 의회가 있는 곳이다. 공화당 소속 리처드 블랙 주 상원의원 방에 들어섰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블랙 의원은 분홍색 종이 한 장을 들어보였다. '얼터너티브(alternative)' - 동해 병기 법안에 대한 대체 법안을 어느 의원이 제출한 것이었다. 민주당 매키친 상원의원이었다. 법안에서 공립학교 교과서에 '일본해를 지칭할 때는 반드시 동해도 언급'하도록 한 부분을 쳐내고, 현행 대로 '버지니아주 교육 지침을 따르라'는 문구를 끼워 넣었다. 법을 바꾸지 말고 지금처럼 하자는 것이니, 동해 병기를 무산시키기 위함이었다.
블랙 의원과 한인 단체 대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상원 상임위 소위원회 통과, 상임위 전체회의 통과, 그리고 이제 상원 본회의 통과가 눈앞인데, 동해 병기 입법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먹구름이 짙게 낀 것이다.
게다가 오늘 아침 워싱턴 포스트는 사사에 겐이치로 주미 일본 대사가 하루 전 리치몬드에 와 매컬리프 주지사와 하월 주 하원의장을 만났다는 기사를 썼다. 로비스트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지 대사까지 나서서 일본 정부 차원의 강력한 로비를 벌인 것이다. (무슨 전조인지 그 기사 부분의 인쇄가 잘못돼 종이가 찢어지는 바람에 제목에 검은색 테이프가 붙여진 채 배달이 됐다.) 의원들은 부랴부랴 새 법안이 제출된 것도 이런 로비의 결과로 봤다.
버지니아 주 의사당 방청석을 한인들이 가득 메웠다.
의사당 방청석은 한인들이 가득 메웠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르신들이 많았다. 일본해가 아닌 1,700년이나 된 우리 이름 동쪽 바다 동해를 되찾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오신 분들이다. 일본에선 NHK 방송이 취재에 나섰다.
의사봉이 두드려지고 30여 개 법안 처리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던 중, 동해 병기 법안의 대안 - 분홍색 종이에 적힌 - 이 상정되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이 대안을 낸 매키친 의원이 발언에 나섰다. 그러자, 원안을 냈던 의원들이 반대 토론으로 맞섰다.
동해 병기를 막기 위해 제출된 분홍빛 수정안은 결국 쓰레기통에.
그리고 표결에 부쳐졌다. 전자투표 결과가 전광판에 떴다. 파란 등이 4개, 나머지 33개는 빨간 빛이었다.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의사당에 안도의 분위기가 흘렀다. 예기치 못한 장애물을 뚫고 나니, 동해 병기 법안 원안 'S.B.2'에 대한 표결은 하나마나였다. 이번에는 찬성이 31표 반대가 4표였다.
방청석에서 한인 단체 대표가 손을 들어 'V'자를 표시했다. 한 아주머니가 불끈 쥔 두 주먹을 들어 올리는 모습도 보였다. 동해 병기 법안이 주 상원 본회의라는 정말 큰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비록 지역 정부라 하더라도 하나의 입법 주체가 동해 병기의 타당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작지 않다. 미 대륙 전역에 걸쳐 최초의 일이다.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됐던 과거의 경험에 비추면 더욱 그렇다. 본회의가 끝난 뒤 블랙 의원은 한인들과 얼싸안았다. 애초 법안을 제출한 민주당 마스덴 상원의원도 표결 전 의원실 앞에서 만났을 때보다 한결 표정이 밝았다.
동해 병기 찬성 토론에 나선 주 상원의원들. 왼쪽이 마스덴, 오른쪽이 피터슨 의원이다.
사사에 일본 대사의 로비에 대해 물었다.
"다른 나라 정부의 로비를 받은 건 보통 있는 일은 아니죠. 여기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처음입니다."
그런 로비를 뚫고 큰 고비를 넘었지만 아직 갈 길은 남았다. 버지니아 주 하원이 기다리고 있다. 상원에서 진행된 절차를 또 거쳐야 비로소 강제력 있는 법, 강행 규범으로 완성된다. 로비의 압박감에 주지사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의회 분위기다. 버지니아에서 최종 입법화가 되면, 다른 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아가 'Sea of Japan' 단독 표기를 고집하는 미국 연방 정부에도 압박이 될 수 있다.
어제(22일) 국무부 브리핑에서 한 일본 특파원이 버지니아 주의 동해 병기 추진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이 뭐냐고 물었다. 미국지명이사회(U.S. Board on Geographic Names)가 정한 표준 명칭은 'Sea of Japan'이며 미국 정부는 오랜 관행인 단일 표기 원칙을 따른다는 답이었다. 그러면서도 대변인은 "한국은 다른 명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과 한국이 함께 이 문제의 진전을 위한 합의점을 찾기를 권고한다"고 덧붙였다.
주 정부 차원에서도 이토록 어려운데, 미국 연방 정부의 단일 표기 원칙을 바꾸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다. 오늘 리치먼드 주 상원 의원들이 인정한 동해 병기의 타당성을 갖고 설득에 나선다면 꼭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을까? 설득의 전면에 정부가 나서는 게 좋을지, 한 발 비켜서는 게 좋을지는 지혜로운 판단이 필요하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니 어느새 버지니아의 북쪽 끝 펜타곤이다. 이제 다시 워싱턴이다,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