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함을 노리는 미끼들
41살 태 모 씨는 사장님입니다. 서울 용산구에 직원 7명을 둔 어엿한 콜센터 대표였죠. 사업의 기초는 문자메시지 발송이었습니다. 고객에서 가짜 정보를 주는 업무죠. 한 건에 20원씩. 이런 일을 도맡는 업체에 맡기면 그만입니다. 7월부터 무작위로 발송된 메시지는 '고객 누구나 소액 대출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자를 본 '고객' 가운데 일부는 사무실로 전화를 겁니다. 대출이 급한 서민들이죠. 전화가 오면, 사기가 시작됩니다.
수화기 너머 여성은 자신을 농협중앙회 소속 영업사원 김 모 씨라고 소개합니다. 가명도 꽤 믿음이 가는 이름들로 골랐습니다. 그리곤 거래 실적을 쌓아 대출을 도와주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속임수죠.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도움의 방식이 꽤 설득력 있습니다. 사투리는 전혀 없습니다. 말솜씨나 안내 문구도 신뢰가 갑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래 기다리셨고요. 오늘 신용보증기금에 지급보증서 신청할 거고요. 지금 신청하면 한 시간에 신청 순서대로 전화가 가실 거예요. 연체 없이 잘 납부할 수 있다고 답변하시고 전화 잘 받아 주시고요. 또, 시중 평점 문제 때문에 통장이 잠깐 지급 정지시킬 수도 있거든요. 지급보증서 발급되면 정상처리 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아마 이 팀장님 전화가실 거예요. 전화 잘 받아 주세요."
이 친절한 '도움'을 받기 위해 그녀에게 줘야 하는 건 개인 명의의 은행 통장입니다. 물론 비밀번호도 알려줘야 합니다. 현금 카드까지 주면 더 좋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통장 전달 방법을 알려준다면, 그때가 이 사기 범죄의 클라이맥스입니다. 퀵서비스로 자기들이 정한 누군가에게 보내면 좋다고 합니다. 싫으면 지하철 물품보관함에 두라고도 합니다. 아니면 범행을 위해 임대한 텅 빈 사무실로 우편 발송해도 좋다고 말합니다. 방법이야 어떻든 통장만 도착하면, 계좌 속 돈은 이미 피해자의 것이 아닙니다.
콜센터도 인출책도 모두 서울에 있다
통장을 넘기는 것으로 '콜센터' 업무는 끝납니다. 통장을 넘겨받은 인출책이 움직일 차례입니다. 인출책은 때를 기다립니다. 조용히 스마트폰을 바라볼 뿐이죠. 경찰에 구속된 중국동포 27살 이 모 씨는 중국 연길이 고향입니다. 흑룡강성에서 온 29살 박 모 씨와 동료입니다. 검거 전까지 각각 서울 서초동과 독산동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도착한 통장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들의 휴대전화에 중국판 데이터 채팅 '위챗'에 메시지가 뜹니다. 네 자리 비밀번호입니다. 그들의 고용주가 보낸 거죠.
이제야 둘은 가까운 은행을 찾습니다. 통장을 넣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인출할 수 있는 만큼 돈을 빼냅니다. 경찰 조사 결과 9월 24일부터 지난 5일까지 빼낸 돈만 8억 2천3백만 원입니다. 돈은 모두 중국 총책의 계좌로 송금했습니다.
이들의 몫은 송금액의 3% 수준이었습니다. 많을 땐 7%를 받기도 했습니다. 건당 1,2만 원에 이런 일을 하는 내국인도 검거됐습니다. 한국 국적의 44살 전 모 씨는 이런 식으로 석 달간 1억 1천만 원을 빼돌렸습니다. 그가 받은 돈은 백만 원이 채 안 됐지만, 수십 명의 피해자는 수백에서 천만 원 넘는 돈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중국동포 3명과 내국인 1명이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에 빼돌린 돈이 9억 3천만 원에 달합니다. 피해자는 5백여 명입니다. 평균 180만 원을 뜯겼습니다. 모두 정상적인 대출이 어려워 '소액 대출' 미끼에 넘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180만 원이 얼마나 큰 돈일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진화하는 미끼들
소액 대출 말고도, 이런 사기에 쓸 미끼는 많습니다. 최근엔 게임머니 사업 등을 빙자, 통장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1주일에 30만 원씩 매달 120만 원을 준다는 사기가 기승입니다. 돈을 받으려면 통장과 비밀번호를 달라는 식입니다. 대학생들이 올리는 아르바이트 광고를 보고 미끼를 던지는 범죄자도 많습니다. 마치 학생들을 취직시켜 줄 것처럼 속인 뒤, 사원증을 만들려면 계좌와 현금카드가 필요하다고 속이는 겁니다.
경찰은 무엇을 빙자하든, 통장과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수법은 보이스피싱 피해로 이어진다고 경고합니다.
지난 13일 서울 강북경찰서는 대출을 미끼로 대포통장을 수집해 온 '사장님' 41살 태 모 씨를 구속하고, 21살 구 모 씨 등 콜센터 직원 7명을 불구속입건했습니다. 또 이들로부터 넘겨받은 통장과 비밀번호를 이용해 현금을 인출한 뒤, 중국 보이스 피싱 조직에 송금한 혐의로 중국동포 이 씨와 박 씨, 내국인 정 씨 등 4명을 구속했습니다.
태씨는 중국에서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을 직접 만나 범행을 모의하고, 피해자들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 텔레 마케팅 경험자만 콜센터 직원으로 고용했다고 경찰은 전했습니다. 경찰은 태 씨가 이번에 적발된 콜센터 외에도 서울·경기 일대에 콜센터 세 곳을 더 운영하며 전문적으로 대포통장을 수집한 걸로 보고 보강 수사를 벌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