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devil is in the details
이해 관계가 첨예한 외교 협상의 경우 힘겹게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루고도 전체 협상이 결렬 되는 경우가 간혹 생긴다. 합의 내용을 문서화하는 마지막 공동합의문 작성 과정에서 문구 하나를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고작 단어 하나 때문에 전체 협상 판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협상을 진행한 외교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역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달 25일 제3차 무역투자진흥확대회의에서 기업인들을 만나 이 관용구를 인용했다. <화학물질 등록과 평가에 관한 법>을 두고 자칫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다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취지가 좋아도 디테일한 부분에서 소홀하면 결과적으로 악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백번 천번 옳은 말씀이다. 바꿔서 얘기하면 디테일을 이리저리 만지면 얼마든지 멀쩡한 법을 악법으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는 뜻도 되겠다.

*** 복잡하고 어려운 수식과 표현...그 이면은
보건복지부가 지난 2일 기초연금법 제정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소득인정액 기준 하위 70%인 만 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최대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국민연금과 연계하여 차등지급하고 전액 조세로 충당한다는 부분도 명시됐다. 큰 틀에서는 그동안 설명해왔던 정부안과 다를바 없어 보인다. 그런데 디테일로 들어가보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당초 보건복지부는 기초연금 정부안을 설명하면서 기초연금액은 임금상승률에 따라 실질가치가 올라가고 최소연금액 역시 현재 가치로10만원이 되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수식까지 내놓았다. (구체적인 수식에 대해서는 다른 취재파일에서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런데 복지부는 정부안을 국회에 제출할 법률안으로 만들면서 '디테일'을 살짝 매만졌다. 기초연금액 절대금액을 결정하는 공식내의 주요 상수와 최저연금액을 명시하는 대신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바꿔버렸고, 임금상승률과의 연동 공식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항목은 복잡하고 화려한 문장으로 슬쩍 대체했다. 한마디로 최저연금액 10만원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기초연금액은 임금상승률 대신 물가상승률에 연동시키겠다는 거다. (통상 임금상승률은 물가상승률 보다 높다. 따라서 실질 화폐 가치 보전에서 불리해진다)
복지부는 법률 용어 활용과 국회 의결의 편의상 그렇게 했을 뿐이며 내용은 기존 정부 설명안과 같이 최저연금액 10만원은 당연히 보장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마디로 자신을 믿어달라는 거다. 하지만 기초연금은 대선 공약으로 등장한 이후 인수위와 국민행복연금위, 정부안 그리고 이번 제정안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바뀌어 왔다.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장태주 즉 고수는 자신을 믿어달라는 상대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약속은 말로 하는게 아닙니다. 서류가 약속이고 돈이 보증이죠." 그렇다. 약속은 말로 하는게 아니다. 법안이 약속이고 문구가 보증이다.
*** "대통령령으로 정한다"의 의미
계산 상수와 최소연금액등은 기초연금의 핵심적인 디테일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법을 만들게 되면 수정과 변경이 매우 수월해진다. 아다시피 한번 통과된 법안을 고치려면 국회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계산 상수와 최소연금액등 기초연금액 산정의 핵심적인 부분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법을 만들게 되면 국회를 거치지 않고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얼마든지 수정과 변경이 가능해진다. 국민의 실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여론이 반영될 틈이 없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프라다를 입은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산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표현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표현에서 파생된 것이다. 어떤 디테일에는 경이로운 신이 존재하지만 어떤 디테일에는 나쁜 악마가 살고 있다. 게다가 악마는 '프라다'처럼 화려하고 복잡한 외피를 두르고 있기에 알아차리기가 더더욱 어렵다. 무심코 지나쳤다가는 자칫 프라다를 입은 악마에게 당할 수 있다. 어렵고 복잡하지만 국민들이 정부의 기초연금법안의 디테일을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