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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집시여, 고향으로 떠나라"…해법없는 전쟁 그리고 희생양

서경채 기자

입력 : 2013.09.29 14:14|수정 : 2013.11.29 19:57


집시는 유랑인입니다. 정주인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역사가 그랬습니다. 정착민인 유럽인들은 떠돌이 집시를 터부시 했습니다. 때로는 집시를 희생양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중세 때는 마녀 취급을 해 화형을 시키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 때 나치는 집시 5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이후 문명사회와 현대적인 정부가 그들의 정착을 유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기질 때문이라는 설명 외에 다른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특별히 달라진 것도, 달라질 것도 없는 그들을 놓고 프랑스가 시끄럽습니다.

프랑스 내무장관 마뉘엘 발스가 "집시들이여, 프랑스를 떠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인권을 우선한다는 좌파 사회당 출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처방을 써봤지만 실패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돈까지 지원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 동유럽 집시들이 프랑스에 동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시 캠프를 철거하고 프랑스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치안을 담당하는 장관으로서 치안 불안과 유럽 내 국경 개방 문제를 염려해 이런 발언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혹은 진실인지 살펴볼까 합니다.
서경채 취재파일_5▶집시는 범죄자인가?

집시들은 파리 길거리에서 개 한 마리를 놓고 구걸을 합니다 지하철에서 앵벌이를 합니다. 몰려다니며 소매치기까지 합니다. 집시 하면 범죄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미지들입니다. 하지만, 집시가 범죄 증가와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른다 입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에서는 범죄와 관련한 인종별 통계를 금지하고 있어서 공식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집시가 유독 프랑스에만 많은가?

아닙니다. 유럽연합이 집계한 공식 통계를 보면 프랑스에 있는 집시는 1만 5천~2만 명입니다. 주변국인 이탈리아에는 15만 명, 벨기에는 3만 명이 머물고 있으니 프랑스는 이보다 적습니다. 집시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프랑스 전체 집시 인구 가운데 2/3가 파리와 그 주변 지역에 살고 있으니 '착시'를 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참고로 집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루마니아에는 185만 명, 불가리아에는 75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서경채 취재파일_5▶'집시를 추방하자'는 주장은 처음 나온 건가?

역시 아닙니다. 우파인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시작한 일입니다. 집시를 내쫓자고 말한 발스 내무장관처럼 사르코지가 내무장관 시절 집시 추방을 지시했습니다. 좌파인 현 사회당 정부도 지난해 올랑드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집시캠프 철거를 시작했습니다. 집시들은 도시 외곽 공터 등을 불법 점거해서 캠핑카나 텐트를 치고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습니다. 국제 앰네스티는 프랑스가 불법 집시캠프를 철거하는 방식으로 지난해 1만 2천 명을 추방했고, 올 상반기에만 지난해와 비슷한 1만 명을 쫓아냈다고 밝혔습니다.

▶집시들의 귀향을 지원하는 제도는 효과가 없었나?

2005년, 사르코지가 내무장관으로 일할 때 '귀향 지원금'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집시들이 프랑스를 떠나 고향 나라로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어른 1인당 300유로, 미성년자는 100유로씩 지원했습니다. 이 제도 덕분에 귀향자가 늘어나더니 2009년 이후부터는 귀향자가 1만 명 이상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는 효과를 본 셈입니다. 하지만, 전체 집시 수는 줄지 않았습니다. 유럽이 하나의 나라처럼 국경이 없어지면서 새로운 집시들이 다시 들어와 채웠기 때문입니다.
서경채 취재파일_5▶집시 추방과 유럽 내 국경 개방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앞서 집시의 고향은 루마니아나 불가리아라고 했습니다. 이 두 나라는 2007년 유럽연합에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유럽 내 국경 개방 조약인 '솅겐조약'은 내년 1월부터 적용될 예정입니다. 즉, 유럽의 한 식구로 받아들여 지긴 했지만, 올해 말까지는 두 나라 국민이 마음대로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관광객처럼 3개월까지는 마음대로 오갈 수 있지만, 3개월이 넘으면 취업이나 학업 등 프랑스에 머물러야 할 사유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사유 없이 장기 체류하는 집시는 불법 체류자인 셈입니다. 그런데, 솅겐조약이 발효되면 국경이 사라져 집시들은 합법적으로 프랑스에 거주할 수 있게 됩니다. 취업의 자유도 얻게 됩니다. 이 말은 프랑스 노동시장이 열린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자리가 부족해 실업자로 넘쳐나는데 새로운 경쟁자들이 뛰어든다면 프랑스 국민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 볼 때 집시가 치안 불안을 직접적으로 야기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발스 내무장관이 집시 문제를 들고 나온 건 새로운 정치 쟁점을 만들어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현 올랑드 정부는 경제 운용 실패와 치안 불안으로 인기가 바닥입니다. 치안 책임자인 내무장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럴 때 거리를 떠도는 골치덩어리인 동유럽 집시를 치안 불안의 원흉으로 몰아가면 자연스럽게 내치의 잘못은 가려지고, 실체도 해법도 뚜렷하지 않은 집시와의 전쟁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게 되는 겁니다. 내년 3월 지방선거와 5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둔 프랑스 정치인들의 셈법일 수 있습니다. EU측의 논평이 그런 추정을 뒷받침해 줍니다 "집시도 유럽연합의 시민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며 "프랑스에서 선거 분위기가 있고, 예산이나 부채 등 중요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을 때 정치인들이 집시 문제를 건드린다"고 지적했습니다.

솅겐조약 발효에 따른 프랑스인의 불안감은 별개 문제입니다. 동유럽 집시들이 합법적으로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면 노동시장은 전쟁터가 될 것이며 각종 사회보장 제도를 악용할 소지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프랑스만이 아닌 유럽 전체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집시가 1천년을 떠도는 동안 마차를 자동차로 바꾸고, 움막을 텐트로 캠핑카로 바꿨을 뿐 떠돌이 인생사는 그대로입니다. 문명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지켜내고자 애쓰는 국경선이 그들에겐 한낱 종이쪽지에 불과할 겁니다.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도, 쫓아낸다고 쫓아낼 곳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과 무슨 수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건지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