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을 단 한번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전형적 서울내기입니다.
서울시를 출입하기 전에도 제가 나고 자라서 살고 있는 터전인 서울에 관심이 많았는데, 기자 생활을 하며 두 번째로 서울시를 출입하고 있는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서울이란 메가 시티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서울내기여서가 아니라 기자적 시각으로 봐도 서울은 들여다 볼수록 참 역동적 매력이 있는 도시입니다.
사람들이 몰리는 동네나 공간이 금새 확확 바뀌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실 불과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가로수길은 서울에서 예술과 트렌드를 선도하는 가장 잘 나가는 동네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온갖 트렌드의 시발점이라 불리는 패션디자이너, 포토그래퍼, 예술가, 요리사들의 매장과 작업실, 레스토랑이 이곳에 대부분 집결했기 때문이죠.
오직 명품매장만 살아 남으면서 대중들과 멀어진 청담동,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특유의 인디문화의 정취가 사라진 홍대 앞을 대신해서 가로수길은 거의 유일하게 최첨단의 트렌드를 느낄 수 있는 동네로 손꼽혔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급격하게 그 위세가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흐름의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자본의 대공습 때문입니다.
지난해부터 거대 다국적 패션회사들은 앞 다퉈 메인 스트리트의 건물들에 초대형 매장을 내기 시작했고, 그들이 천정부지로 임대료를 올려 놓자 결국 가로수길 유행의 시발점이 됐던 신진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비싼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가로수길을 빠르게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패스트 패션' 매장과 각종 커피전문점과 화장품 매장들이 장악했죠.
한 부동산 컨설팅 회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년 전 680만 원이던 66제곱미터(20평) 가로수길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건물 임대료는 현재는 평균 3천 2백만원에 이르렀습니다.
얼마 전 가로수길의 달라진 지형도를 취재했던 저는 짐작은 했지만 초반 가로수길을 대표했던 예술가들이 거의 90% 이상 사라진 상황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그런데 가로수길을 떠난 이들을 만나보니, 그들이 예술적 터전이었던 곳을 떠난 이유가 폭등하는 임대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가로수길을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지역신문과 웹진을 만든 한 예술가는 가로수길의 몰락은 사실은 임대료가 아닌 그 지역의 문화적 공간적 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공간을 유행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 까지는 선구안을 지닌 트렌드 리더들의 역할이지만 그곳의 생명력이 유지 되기 위해선 그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강력한 아우라가 있어야 하는데 가로수 길엔 바로 그 '아우라'가 없었다는 겁니다.
전 가로수길을 떠난 이들이 옮겨 가는 곳이 서촌이나 이태원 등 모두 어떤 형태로든 동네만이 지닌 역사와 스토리가 풍부한 '강북'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특히 서촌은 조선시대 한옥부터 일제 시대 적산가옥은 물론 근대와 현대의 모습이 공존하는 골목의 정취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가로수길이 주목받던 초창기부터 가로수길에 머물렀다가 최근에 서촌으로 작업실을 옮긴 한 디자이너의 얘기는 흥미롭습니다.
가로수길에선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트렌디한 레스토랑에 가도 늘 뭔가 붕 떠있단 생각이 들었는데 서촌에 오니 그런 기분이 싹 가셨단 겁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수십년, 수백년 전 이곳에 살던 이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기도 하면서 묘하게 편안한 기분이 든다는 겁니다.
가로수길을 주도했던 이들이 바로 90년대에 오렌지족, X세대로 불리며 압구정문화를 창조한 이들인데,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인 강남을 버리고 수많은 역사적 정취가 담겨 있는 지역을 선택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건 이제 우리도 전혀 화려하고 멋지진 않지만, 살아온 삶의 역사와 궤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 얼마나 가치 있다는 것을 우리 젊은 세대들이 인식했다는 방증 아닐까요?
2013년 서울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앞서 서울을 살았던 이들의 흔적을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서울이라는 공간'에 대한 우리의 통찰이 깊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래서 가로수길 전성시대의 몰락이 참 반갑고, 서울에서 앞으로 주목받는 공간의 이동현상을 계속 열심히 취재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