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의 신작 '바람이 분다(風立ちぬ)'가 5일 국내에서 개봉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35년 일본의 항공모함 이착륙 전투기-공식명 영식 함상전투기(줄여서 영전 '제로센')-를 설계한 '호리 코시지로'의 삶을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제로센 전투기는 카미가제 자살 특공대 기체로도 사용됐습니다.)
일본에서는 지난 7월20일 개봉한 이후 지금까지 7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면서 누적관객 73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일본의 영화관람료가 1800엔으로 우리 돈 2만원 정도하고, 최근 일본인들의 영화 관람 횟수가 조금씩 줄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1000만-1200만 관객 영화와 비슷한 인기라고 보면 될 듯합니다. 특히 6일 미야자키 감독이 은퇴 기자회견을 연다는 소식에 그의 마지막 작품을 보려는 일본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무기를 만든 사람을 미화했다"는 논란이 커지고 있죠.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논란을 제외하고' 딱 영화의 재미로만 판단했을 때 제 평점은 ★☆ 입니다. 물론 저보다 훨씬 영화를 깊게 보고 좋은 평가를 해주신 분들의 리뷰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리뷰1] [리뷰2]
극우적 내용이 들어 있느냐? 아니, 안 들어 있습니다. 전쟁을 미화했냐? 미화했다기 보다 현실에 눈을 감았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전쟁의 잔인함, 또 그 속에서 갖은 고생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대로 담겨 있지 않습니다.(일부 있기는 하지만, 사실적이지 않습니다.) 오직 전투기 설계에만 몰두하는 '항공 엔지니어'의 모습에 집중하죠. 이 때문에 고난 및 갈등 극복을 통해 나타나는 극의 긴장감이 크게 부족하다는 평가입니다.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은 여전합니다.)
그럼, 일본 관객들은 왜 이렇게 많이 본 걸까요? 우선, 미야자키 감독의 5년만 신작이자 은퇴작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한국의 '설국열차'처럼 영화의 호평/악평이 갈리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관객들이 많았다는 분석입니다. 실제 일본 야후 영화 코너에서 '바람이 분다'의 평점은 3.36/5점, 영화정보사이트 eiga.com의 평점도 3.8/5점에 그치고 있습니다.
일본 관객들의 리뷰를 살펴보니 역시 엇갈리네요. "전쟁 당시 일본인들의 고통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 꿈에만 매달리는 주인공에 실망", "가혹한 시대, 한 인간이 슬픔이나 무력감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꿈과 사랑을 추구하는 모습이 좋아", "대사 자체가 너무 짧고 건조했고,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도 실망스러워", "일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는 사회인에게는 좋은 영화" 등등...

그런데, 저는 오히려 다른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바로 엔지니어에 대한 일본인들의 존경과 사랑입니다.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일본 방송국들도 각종 특집 프로그램들을 방송했는데요. 8월15일 NTV 'News Zero-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제로센 설계자의 고뇌', 8월26일 NHK '미야자키 하야오 스페셜-바람이 분다 1000일의 기록' 등입니다. 앞서 일본과학기술진흥재단은 지난 6월부터 '일본의 항공기술 100년전-호리 코시지로의 생애'를 개최하기도 했죠. 관련 행사와 프로그램 대부분이 엔지니어로서 호리 코시지로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전후 1962년 일본 여객기 개발 프로젝트 YS-11를 주도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군요.
엔지니어에 대한 일본인들의 존경과 사랑은 자동차 분야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한국의 경우 신차가 나오면 가장 주목받는 사람들이 바로 디자인팀이죠. 기아차의 디자인 총괄 부사장 피터 슈라이어가 인기를 끌고, 해외 유명 자동차 회사들에서 일하는 한국인 카디자이너들이 주목을 받습니다. 일본의 경우 신차 발표 때 주로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은 바로 엔지니어입니다. 2009년 일본 토요타가 3세대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를 발표했을 때 전세계를 돌며 각국 언론에 조명을 받은 사람은 수석개발팀장 오츠카 아키히코(大塚明彦) 였죠.

일본 후지TV의 예능프로그램 '호코다테(ほこ×たて/창과 방패)'. 이 프로그램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가 '절대 뚫리지 않는 금속 vs 무엇이든 뚫어버리는 드릴'입니다. 드릴공작기계회사들과 금속가속회사들의 경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011년에는 세 차례가 초강력 드릴을 막아낸 29살의 금속기술자가 출연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정말 엔지니어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방송 소재와 등장인물들이 아닌가 합니다.(인터넷에서도 쉽게 관련 영상을 찾을 수 있는데 재미있습니다.)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도 오직 비행기에만 매달립니다. 그리고, 영화는 전쟁이나 우경화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가진 엔지니어' '뭔가를 달성하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엔지니어' '그런 엔지니어를 보호해주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끝내 성공하는 엔지니어의 성취'를 미화합니다.(미화라는 표현은 좀 과하다는 생각도 있어서...)
이 영화에서 정말 주목할 부분은 일본의 우경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전쟁의 참상을 축소 묘사한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일본의 역사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경화 역사 논쟁보다 오히려 기술 강국 일본과 엔지니어 중심 문화를 본 것은 저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