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존경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해마다 8월이면 언론은 일본과 관련해서 비슷한 뉴스를 되풀이해서 내 보낸다. 뉴스를 취재 보도하는 언론 종사자로서야 새롭고 의미 있는 뉴스거리를 찾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현실은 전혀 달라서 매양 이 무렵이면 역사 문제에 관한 일본 정치인의 언동에 초점이 모인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를 미화하고,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 일본의 자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시아를 서구 제국주의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도 외친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에서는 '망언'이라고 비난한다. 특히 일본 정부 각료와 정치인들에 관해서 역사 인식 문제를 집약한 상징적인 현장이 있으니 바로 '야스쿠니(靖國)'다. 일본에서 8월 15일은 2차 대전에서 패배해 항복을 선언한 날이지만, 절대로 패전이라고 하지 않고 '종전(終戰)기념일'이라고 부른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가 바탕에 깔렸다.
야스쿠니는 도쿄 시내 중심부 치요다(千代田)구 구단(九段)에 자리한 일본 전통 종교 시설 '진자(神社)'다. 원래 이름은 '도쿄 초혼사(東京 招魂社)'였다. 넋을 불러 모셔서 위로한다는 뜻이다. 어떤 넋인가? 답은 제국주의 일본의 출범 전후 광풍의 역사에 들어있다. 일본이 무사 정권인 바쿠후(幕府)체제를 끝내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출범하는 이른바 메이지(明治)유신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신, 구 체제의 충돌로 내전이 벌어진다. 1868년 무진(戊辰)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보신센소(戊辰戰爭)'라고 부른다. 새 정부의 관군으로 싸우다 전사한 사람이 7,751명이나 된다. 메이지 정부는 수많은 전몰자를 위하여 보란 듯이 제사할 자리가 필요했다. 1869년 6월 19일 옛 바쿠후의 군 주둔지였던 구단 언덕에 초혼사의 첫 삽을 뜬다. 10년 뒤인 1879년 야스쿠니(靖國)신사로 이름을 바꾼다.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다. 모두 메이지 천황 무츠히토(睦仁)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여느 신사와 달리 군부의 중심인 육해군성이 직접 관리를 맡았다. 천황을 위해 전사한 군인의 위패를 받들며 '영령(英靈)'으로 추앙했다. 무츠히토가 친히 찾아가 배례하고 시 한 수를 바친다. ''나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의 이름을 무사시노에 모시는 신령한 울타리'. 야스쿠니신사 본전 휘장과 홈페이지 첫 머리엔 이 구절이 장식한다. 20세기 들어 일본이 벌인 아시아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은 물론 민간인, 심지어는 식민지배한 나라 사람들까지 246만6천 명의 위패를 안고 있다. 2차 대전 전범들까지 영령으로 존경받는 곳이다. 천황을 인간으로 나타난 현인신(現人神)이라고 내세우며, 그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도록 홀리고 기만한 지배 이데올로기 메카니즘의 기관, 야스쿠니는 그 자체가 전범의 성격을 지녔다고 일본의 사회평론가 츠다 미치오(津田道夫)는 갈파했다.

1945년 패전으로 야스쿠니는 더 이상 국가 기관이 아니라 종교법인으로 내려앉았지만, 보수 자민당 정권은 야스쿠니의 격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노려왔다. 1969년엔 '야스쿠니신사 국영법안'을 제출했다가 헌법의 정치와 종교 분리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는 맹 비난을 샀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70년부터 73년까지 해마다 법안을 냈다. 비판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자민당은 1975년에 와서야 법안 제출을 포기했지만, 대신에 전략을 바꾼다. 바로 정치인, 특히 정권의 수장인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새 노선에 따라 1975년 8월 15일 미키(三木) 총리가 '개인 자격'임을 내세워 참배함으로써 길을 열었다. 당당하게 '공식 참배'를 처음으로 감행한 총리는 10년 뒤 나카소네(中曾根)다. 빗발치는 반대 여론을 향해 나카소네는 이렇게 반격했다. '미국에는 알링턴 묘지가 있고, 소련이나 다른 나라에는 무명용사 탑이 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께 국민이 감사를 드리는 장소가 없다면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겠는가?' 나카소네는 때맞춰 누리게 된 경기 활황과 높은 내각 지지율에 자신감을 얻어 외교력을 높이고 자위대 군비를 늘려갔으며, 교육과 사상 면에서 서슴없이 보수 우파의 색을 더욱 짙게 칠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해군 장교로 참전한 경력의 나카소네로서는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행위가 침략 전쟁 범죄였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야스쿠니에 대한 일본 보수 정치인들의 집착은 나카소네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다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까지 결성했을 정도다. 올해는 무려 102명이나 참배해서 지난해 55명의 2배 가까이 늘었다. 야스쿠니 참배와는 별도로 8월 15일에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 길 건너편 부도칸(武道館)에서 천황 부부와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국가 공식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을 치른다. 이 자리에서 나오는 추도사가 어떤 내용이며 어떤 수준인가에 일본 안팎의 관심이 쏠린다. 역대 총리들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끼친 가해를 인정하고 전쟁하지 않겠다고 표명해왔지만 올해 아베 총리는 최소한의 반성 표현도 담지 않았다. '역사에 겸허하고 배워야 할 교훈은 깊이 가슴에 새기겠다'는 애매한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다. 1995년 무라야마 총리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를 수치로 알고 부정하는 퇴행적 역사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전몰자 추도식 자체도 일본이 과거 침략 가해 역사를 잊고 있음을 드러낸다. 흰색과 노란색 국화로 장식한 제단에 세운 추모비문은 '전국 전몰자의 영'(全國戰沒者之靈)'이다. 추도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과거 자신들이 일으킨 소위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으로 연합군의 공습이나 상륙전 와중에 목숨을 잃은 자국민으로 선을 긋는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로 인해 희생된 아시아 각국인에 대한 미안함 같은 건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도칸 아래 해자 주변의 벚꽃 명소로 이름난 치도리가부치(千鳥が淵)의 무명 해외 전몰자 35만 명을 기리는 묘원도 자신들의 피해상만 처연하게 드러내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 패전의 상처를 달래고 치유하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패전을 빚게 된 원인인 가해 역사를 끝까지 감추기만 해서는 일본이 아시아 이웃나라들에게 진정으로 신뢰받지 못한다. 일본 내에서도 야스쿠니를 대신해서 새로운 국가 공식 추도 시설을 세우자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야스쿠니를 끔찍이도 받드는 전몰자 유족회와 우경화된 일본 정치인들에게 막혀 빛을 못 보고 있다.
일본은 야스쿠니에 스스로 발목을 묶지 말고 과감하게 발상과 의식의 대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도쿄 한 가운데 '태평양 전쟁 희생자 추모비'를 세우고 '평화기념관'을 세우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부국강병으로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이웃 나라들을 침탈하고 고통을 끼친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추모비와 기념관에 아시아 각국 정상과 전쟁 피해 희생자와 유족을 초청해 엄숙한 추도식을 치르는 것이다. 아직 생존한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앞자리에 모시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이 그렇게 하면 열망하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도 수월하게 풀릴 수 있고 덕을 갖춘 국가로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있을 것이다. 20년 전 주일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일본 기자들의

간담회 자리에 끼어 이렇게 제안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일본은 여전히 야스쿠니에 매여 있다. 일본은 근면 검소한 국민성과 질서의식, 높은 문화와 경제력, 과학기술 수준을 자랑하는 강대국이다.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공헌'을 외치는 나라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를 아베 총리 수준으로 고른다면 일본 국민의 정치와 역사 인식은 딱 그 수준으로 얼마나 편협하고 닫혔는지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이 아시아 이웃들과 통하는 역사 인식을 갖고 진정으로 화해하는 날이 오기를 목 놓아 고대한다. '일본이 마침내 역사를 바로 보고, 아시아의 진정한 벗이 되겠다고 자세를 고쳤습니다!'-- 이런 뉴스를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