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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948년 강제 '블랙아웃'…전력도 무기가 될 수 있다

조정 본부장

입력 : 2013.07.11 10:35|수정 : 2013.07.11 14:49


해방 공간에서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하던 1948년 5월 14일 밤. 서울과 경기지역은 암흑천지로 빠져들었다. 북한이 남한으로 가는 송전선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당시 북한은 방대한 수력 자원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많은 전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압록강의 수풍 수력과 지류의 장진강 수력, 부전강 수력 등을 합쳐 170만 킬로와트 규모에 이르렀다. 지금으로 치면 원전 한 개 반 정도가 생산하는 전력량에 불과하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한 양이었다. 그 때 남한은 영월 화력과 당인리 화력, 한강의 청평 수력 등을 더해 24만 킬로와트 발전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송배전 시스템상 북한에 가까운 서울, 경기 지역은 남쪽이 아닌 북쪽 전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남한 전기의 70%를 책임지고 있던 북한이 일방적으로 송전선을 차단해 버리자 남한 사회가 혼란에 빠진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랬다. 북한은 해방이후 2년여 동안 남한에 전기를 공급한 대가를 요구했다. 남측은 현금 지급이 어려워 주석과 전화기, 전구, 쌀, 고무신, 휘발유 등 현물을 지급하기로 약속한다. 1948년 당시 1차 지급분을 북측에 전달했으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물건의 품질이 나쁘고 제때에 공급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내면에는 남한에 대한 정치적인 불만이 깔려 있다. 남측은 독자적으로 총선을 치르기로 하는 등 본격적으로 북한과 선을 긋기 시작했고, 북한은 전쟁준비를 위해 서서히 남한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던 것이다.

1948_강제단전사상 초유의 강제 '블랙아웃'에 대한 기록은 전력거래소의 문서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전산실 옆 창고에서 역사자료를 정리하던 전력거래소 직원은 비교적 깨끗하게 보관된 68년 전 개인 업무일지를 찾아낸다. 그것은 당시 조선전업주식회사에 근무하던 신기조 과장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날짜별로 업무 현황과 함께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을 꼼꼼히 바른 글씨체로 써내려 갔다. 신기조 과장은 아흔을 훌쩍 넘은 나이로 아직 생존해 있다고 한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의 기록은 해방 이후부터 6.25 이후까지 우리 전력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신과장은 일지에 1948년 5월14일 낮 12시 북한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단전 통보를 전해 듣고 "이북서 각 송전선 차단함", "원활한 해결이 있기 전까지는 송전 불능"이라고 기록했다. 단전 이후 남한은 전기 생산을 늘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남한 최대 발전설비인 영월화력에 대해 긴급복구공사를 시행했고, 아울러 관련 연료인 영월탄전의 채탄량을 증대시키는 조치를 했다. 또 당인리 화력과 부산화력의 발전량 증가를 위해 일본산 유연탄의 수입을 허용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목포 중유발전소와 섬진강 수력공사 계획이 추진되었다.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전 국민적인 절전운동도 전개한다.

가정용 전등 30와트 이상 사용을 금지하고, 기획 배전과 윤번제 배전을 실시하였다. 요즘 말로 허리띠 졸라매기, 수요관리에 사력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절대부족량은 70~80메가와트나 되었고 사회 전반에 전력부족으로 인한 피해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주물, 방적 공장이 큰 타격을 받았고, 5.14 단전 시기는 벼농사 농번기와 겹쳐 관개용 전력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 쌀 55만석 정도의 수확 감소를 초래했다.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인 서울-부산의 전차운행도 대폭 축소돼 교통대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1948년의 전력위기가 북한의 강제 단전에 의한 것이라면 지금의 전력대란은 우리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각종 비리로 얼룩진 원전관련 기업들의 일탈과 그것을 관리감독하지 못한 정부, 아까운 줄 모르고 전기를 펑펑 써 댄 일부 의식없는 전력 소비자들의 행태가 '블랙아웃'의 위기를 불러왔다. 해방 직후 윗대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올 여름에 '절전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슬기롭게 극복하고, 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전력 산업 전반을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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