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기소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원세훈 원장에게는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을 위반한 혐의가 적용됐습니다. 국정원 사건 수사를 축소 은폐하도록 지시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역시 기소하기로 했습니다. 말이 어렵습니다. 쉽게 말하면 '두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재판에 넘기기로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검찰이 죄를 묻겠다고 발표했건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이건 무슨 경우일까요. 비판의 요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검찰이 정권 눈치 보느라 두 사람을 봐줬다" 아니. 재판에 넘겨 죄를 묻겠다는데 뭘 봐줬다는 건가요? 진짜로 봐 준 걸까요? 한 번 살펴봅시다.
대선을 앞두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국정원 직원들에게 지시를 했습니다. 여당이 계속 집권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라고. 그래서 국정원 직원들이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그 움직임이 기껏 인터넷에 댓글이나 다는 거라. 참.. 거시기 합니다만) 이를 부당하다 여긴 국정원 직원이 야당에 제보를 했습니다. 그래서 고발이 이뤄졌고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두둥.
대선을 코앞에 둔 어느 날. 대선 토론이 끝난 직후 갑자기 경찰이 발표를 합니다. 수사가 끝나기도 전인데. 아주 뜬금없이. 이례적으로 말입니다. "증거를 못 찾았다"고요. 그러자 옥신각신 지리멸렬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여당이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국정원의 작업, 경찰의 섣부른 발표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해석만 분분할 뿐)
선거는 끝났어도 수사는 안 끝났지요. 경찰이 수사를 마무리 짓고 결과를 내놨습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의견 송치" 쉽게 풀면 이런 뜻입니다. "원세훈 전 원장이 잘못은 했다. 국정원 직원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데 여당 편을 들었다. 그러니 국정원법을 어긴 죄로 재판에 넘겨주시길. 하지만 대선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
경찰 수사 결과가 검찰로 넘어왔습니다. 검찰은 특별수사팀을 꾸렸습니다, 사안이 사안인만큼. 그리고는 특수수사로 유명한 윤석열 여주지청장을 팀장으로 빡세게 수사를 했습니다. 수사팀 모두가 보안서약서를 쓰고 외부와 연락을 끊었지요. 사건 관계자가 아니면 통화도 안 했습니다.(기자는 물론, 같은 검찰 직원끼리도 통화가 안 될 정도였습니다. 국정원을 상대로 한 수사이니, 본인들이 도청당할 수 있다는 압박감이 심했다는군요)
가열찬 수사 끝에, 수사팀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사 결과는 이런 내용입니다. "조사해보니.. 원세훈이 선거 개입을 지시했다. 국정원법만 위반한 게 아니라 공직선거법도 위반했다. 원세훈의 부당한 지시로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 또 중간에 뜬금없이 결과 발표를 한 김용판 서울청장도 대선에 부당하게 개입했다. 수사를 축소, 은폐하기도 했다. 사안이 중대한데다 주변 사람과 말을 맞출 우려도 있으니 두 사람 다 구속하자."
경찰도, 여당도, 청와대도 깜짝 놀랄 내용이지요. 서슬퍼런 정권 초기에 쉽게 내기 힘든 결론이잖습니까?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빡센 수사로 관련 진술과 증거들을 확보했는데. 재판에 넘겨서 시비를 따지자는 수사팀의 의견을 총장도 수긍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장관이 오케이를 안 해 줍니다. 그래서 발표를 못했습니다. 아니. 장관이 무슨 권한으로 검찰 수사를 막냐고요?

검찰은 법무부 산하 조직이기 때문에 장관의 지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장관은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 감독할 수 있습니다. 사건에 대한 부당한 외압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인데요.(검찰청법 8조: 법무부 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 수사팀에 전화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총장 만큼은 지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를 활용해 황교안 장관이 일종의 꼼수를 쓴 셈입니다. 선거법의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이용한 거죠. 원세훈의 선거 개입 자체는 문제삼을 수 없으니, 재판에는 넘기되 구속은 하지 말자는 식으로. 그렇게 보름 가까이를..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물밑에서 씨름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삐걱거리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지만, 공식적으로는 검찰도 법무부도 부인했습니다. "우리 안 싸우는데?"(야.. 너 코피 나..)
검사들의 비리가 잇따라 터져나오고, 검찰총장과 검사들이 싸우고, 중수부가 없어지는 치욕을 겪은 지 1년도 안 된 마당에. 검찰의 입지는 좁았습니다. 구속 문제를 놓고 장관과 대판 싸우자니, 명분도 조금 약했습니다. 도주의 우려가 없고, 증거도 웬만큼 확보됐으니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할 가능성이 있는데다가, 엄밀히 말하면 장관이 총장을 지휘하는 것은 불법도 아니니까요.
우리나라는 검찰만 유일하게 기소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소권이란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판단해서 재판에 넘기는 걸 말하는데요, 이 권한이 막강합니다. 때문에 검찰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치밀하고 꼼꼼하게 사안을 살피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때로는 난감하고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결과에 따른 파장보다는 본인들의 역할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최종 판단은 법원이 하면 될 일입니다.
수사팀의 구속 의견을, 법무부 장관이 묵히고 묵히다 엎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하기에도 애매합니다. 그러니 검찰 입장에서는 얄밉고 분하고 환장할 노릇일 겁니다. 지난 정권 내내 법과 원칙보다는 정치적인 고려에 매달려 피를 본 검찰.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법대로 원칙대로,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겠다고 공헌한지 반년도 안 지났는데. 참.. 자세 안 나오죠.
장관의 잘못으로 결국 검찰이 똥물을 뒤집어 쓰긴 했습니다만, 국민들은 누구 잘못으로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가 아니라,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를 살핍니다. 정치적인 좌고우면이나 졸렬한 사수는 결국 승복이 아닌 굴복을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검찰이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계산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때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