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가정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빠는 왜?"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예뻐해 주셔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한참 화제가 됐던 한 초등학생 어린이의 시입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에 놀라 "넌 대체 학교에서 무얼 배운거니? 아빠를 냉장고보다 못하게 여기다니!" 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개념없는 어린이라고 이 아이를 감히 꾸짖을 수 있을까요? 과연 내 가정은 예외일 수 있을까요?
가정의 달을 맞아 황금연휴 첫날인 17일 8뉴스에 '위기의 아버지들: 아버지는 투명인간?'이 보도된 이후 인터넷 상에는 수백 개 댓글이 달렸습니다. 도저히 일찍 들어갈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 속 아버지들의 슬픈 자화상을 탄식하는 목소리부터, 아빠를 돈 벌어오는 사람으로만 인식하는 엄마에 대한 분노의 글들도 있었습니다. '과연 내 가정은 다를 수 있을까' 반성하는 글들 뿐 아니라 금방 이혼이라도 할 법한, 해체 위기에 임박한 일부 문제있는 가정의 이야기를 왜 전체의 이야기처럼 확대하느냐고 항의(?) 하는, 격앙된 글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내 가족들과도 제대로 속 터놓고 이야기해본 적이 없기에... 내 가정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아버지들 얼마나 될까요? 내 아내는, 내 아이는 나를 그렇게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들의 불안감이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앞만 보고 나아가느라 가장 소중한 내 가족은 미처 챙기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입니다.
저도 취재를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지는 투명인간?" 그건 일부 문제있는 가정, 해체 직전의 위기의 가정에만 내재돼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습니다. 처음엔 보도 일정이 임박해서 얼굴을 공개하고 가족 전체가 인터뷰하겠다고 동의하는 가족을, 특히 파국 직전의 가정을 찾기 상당히 힘들었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아가는 차원에서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정의 평범한 일상을 심리적으로 파고 들기로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담담하게 그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놀라웠습니다.
뉴스에 등장한 첫 번째 가정은 겉보기에는 문제가 전혀 없는, 부부싸움이라고는 1년에 한 번도 잘 하지 않는 화목한 가정입니다. 서로 간에 별 불만이 없다고 여겨오던.. 주말에는 시간 쪼개어 가족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던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의 평소의 모습,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려달라고 요청드렸더니 부부가, 아이가 속에 담고 있던 얘기는 달랐습니다. 단지 평온한 가정을 위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고 지내왔던 것이지요. 아이에게 비친 아빠의 모습도 "잘 때 들어오는 사람" 이었습니다.
위기의 투명인간... 처음엔 서로를 배려했던 건 뿐인데...
아무 문제없던 한 가정이었는데 어느날 돌아보니, 아버지가 귀가하면 거실에서 놀던 엄마와 아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 옷을 갈아입은 아버지가 향하는 유일한 곳은 거실의 소파가 됐습니다. 간식을 주섬주섬 챙겨 누워서 TV를 보고 컴퓨터 게임도 하다가 혼자 소파에서 잠이 듭니다. 집 안에서 소파는 유일한 아버지의 공간입니다. 아버지가 보던 책들도 아이들 책에 파묻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군요. 부부 침실도 어느새 엄마와 아이의 공간이 되어버렸고, 사랑하는 그들의 달콤한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는 소파를 택해야 했습니다.
아내: [어느 날은 원하지도 않는데 일찍 오면 어이가 없는 거지, 갑자기 밥 차려야 하면 귀찮고 두어 시간 흐르고 나면 아이의 생활리듬도 깨지잖아요.… 소파에서 맴도는 남편을 보면 왜 저럴까 싶으면서도 안쓰럽긴 해요. 자기 말로는 소파가 좋대요. 그게 진짜 좋을까요?]
남편: [불만은 없어요. 진짜. 혼자라도 어떻게 풀어야 하는데 풀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 PC에 매달려 시간 보내거나 소파에서 혼자 시간보내거나 하는거죠… 어떤 때는 가끔 결혼은 왜 했나 그런 생각 한 적 있어요.]
겉으로는 상대를 위하지 않는 대화인 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랜 배려가 빚어낸 안타까운 현실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배려한다고 각자의 공간을 지켜준 건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어느새 멀어져 버렸습니다.
아내: [멀어지기는 확실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아이들 중심으로 가다 보니까... 안쓰럽긴 한데 그게 아빠의 인생이지 않을까. 솔직히 좀 많이 벌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죠.]
사회에서 우뚝 서기 위해 바쁘게 일하는 아버지들, 일찍 들어와서 아이들과 놀아주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겁니다. 이 가정은 싸우지 않기 위해 부부가 서로를 배려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역시 아이 챙기고 난 뒤 남편을 감싸주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답답한 속 같이 시간 내어 풀어달라고 하다가 부부싸움 하느니, 참고 각자 시간 보내다보니 멀어져 버린 겁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아버지 시간 혼자 가질 수 있도록 각자를 존중하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밖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도 바쁜 스케줄이 있고, 집에서 아이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에게도 바쁜 일정이 있었던 거죠. 아이가 커 가면서 아이가 중심이 되었고, 늦게는 새벽에, 이르더라도 저녁 9시 넘어 귀가하는 아버지의 스케줄은 어머니와 아이에게는 부담이었던 겁니다. 아이는 저녁 9시쯤이면 일과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고, 아버지가 어설프게(?) 일찍 들어올 경우 생활 리듬이 깨지기 때문에 서로 조심할 수 밖에 없게 된 거죠.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따로 생활하는 게 편해져버린 현실 속에서 가족들 모두가 어떻게 해야할지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산 것 뿐인데... 외톨이가 된 아버지, 어떻게 해야 할까?
가족 모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어느새 투명인간이 되어있는 아버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산 것 뿐인데 억울한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세우는 것도 아버지가 가정에서 해야 할 역할입니다. 가족을 생물학적으로 먹여살리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아버지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위상을 다시 세우는 데는 어머니의 도움이 절대적이겠지요. 엄마가 없을 때 그 자리를 대체하는 ‘제2의 엄마’로서가 아닌, 아버지로서 가정해서 해야 할 역할은 따로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가장으로서 권위와 역할을 존중받던 과거 농경사회와 달리 열심히 일했는데도 가족들이 느끼는 아버지의 위상이 달라진 이유는, 현대사회에서는 아버지는 일하는 모습이 가족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빠가 왜 바쁜지 가족들이 이해하고, 보고 느끼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죠. 안 보인다면 눈으로 보여주든 말로 들려주든 알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슴 속에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 있는 자녀를 아버지가 직장에 가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지, 사회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는 모습을 보여줬더니, 그동안 죄송했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는 일화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힘겨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깊은 속을 다 표현할 수는 없을지라도,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운지 아내에게, 자녀에게 알리려는, 용기있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건 아버지의 몫입니다. 한 번에 다 보여줄 수는 없을지라도, 조금씩 자녀와 친해지고 배우자에게 다가가면서 기회를 엿볼 수도 있겠지요.
남편: [불 꺼진 소파에서 누워있는 그 느낌은 정말 참담한 느낌이죠. 그때는 정말 많이 억울했죠. 따뜻한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내: [보통 엄마들이 그렇잖아요. 아빠를 큰아들로 생각하기도 하고. 외롭거나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라고는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죠…]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화목한 가정이라고 생각해왔던 이 부부도, 상대가 외로움을 느꼈는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방송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듣게 된 상대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비교적 속을 터놓고 대화하는 가정이지만, 외로운 속내까지는 차마 털어놓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외톨이가 되어있는 신세에 참담함을 느꼈던 이 아버지는, 스스로 ‘아버지 학교’를 찾아다니고, 고민하다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들에게 웃음을 주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가족과 함께 하려 노력해야 겠다는 깨달음에서 얻은 작은 실천은 생활을 조금씩 바꿔놨습니다. 어느 문제 있는 가정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끔 외로움을 느끼신다면, 나의 가정 역시 언젠가부터 서로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 뿐인데 어느날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현실을 한탄하기 보다는 더 멀어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가족들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화 한 번 나눠 보는 건 어떨까요? 가족을 향해 스스로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더 깊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