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파 감독 로랑 캉테가 1950년대 미국의 풍경을 10대 비행 소녀를 통해 그려냈다.
지난 25일 막을 올린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된 로랑 캉테의 '폭스파이어'(Foxfire)는 우리 모두가 거쳐온 불안정하고 위험한 사춘기의 한 순간을 섬세한 손길로 다뤘다.
'폭스파이어'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성폭력을 경험하고 상처 입은 소녀들이 세상에 맞서는 과정을 그린 작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는 영미권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했다.
멘디, 레그, 골디, 비비 등의 10대 소녀들은 부모와 불화를 겪거나, 가족 혹은 친구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등 저마다의 이유로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과 섞이는 대신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그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 바로 '폭스파이어'다. 외부에서 보기에 '폭스파이어'는 불량조직과 다를 바 없지만, 소녀들에게 이 울타리는 집이나 가족보다 더 따뜻하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한 복수를 시작한다. 학생을 무시한 선생을 유치한 방법으로 응징 하거나, 조카를 간음하려는 삼촌을 사정없이 폭행하고, 돈을 뜯어내기 위해 중년의 남성을 유혹하는 등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거칠고 서투르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것이 비뚤어진 세상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식이라 믿으며 대담한 행각을 일삼는다.
복수와 응징의 카타르시스를 즐기던 소녀들은 어느 순간 자신만의 공동체를 꾸려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이같은 꿈이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히자 이들은 해서는 안될 짓까지 계획하게 된다. 그 가운데 각자의 이해관계가 부딪치고, 공동의 목표가 분산되며 갈등을 겪기도 한다.
영화 '클래스'(2008)를 통해 도시 빈민가 고등학교 교사와 아이들의 문제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차분하게 그려낸 바 있는 로랑 캉테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사회적 문제를 부드럽고 또 때론 날카롭게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어쩌면 바르고 곱게 자랄 수도 있었던 소녀들이 어떻게 범죄소녀가 되고, 범죄소녀가 된 이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가에 대한 풍경을 시종일관 담담하고 차분하게 담아냈다. 무엇보다 유리창처럼 투명하고 깨지기 쉬운 10대 소녀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여자 감독보다 더 섬세하게 표현해낸 점이 인상적이다.
감독이 주목한 것은 1950년대의 미국 사회였다. 소녀들이 만나는 다양한 외부 인물을 통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대립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이름 아래 풍선처럼 커졌던 미국인들의 꿈과 좌절을 거론하기도 한다.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꿈이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너무나 손쉽게 허물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아이들의 방황과 타락이 외부 요인에서 비롯됐다는 넌지시 보여주지만, 직접적인 비판이나 비난의 날을 세우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소녀들의 미래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조차, 구체적인 마무리를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 스스로 판단하게끔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출연진은 대부분 신인이다. 이들은 연기 경험이 전무하지만, 계산되지 않은 정직한 연기로 자신의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특히 주인공 '멘디' 역할의 케이티 코시니는 방황의 긴 터널을 뚫고 나와 성장과 성숙을 거듭한 캐릭터를 꼼꼼하게 연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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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