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남자가 됐다. 앳된 얼굴에 교복을 입고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던 하숙범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 겨울’, 바람이 부는 동안 남자의 향기를 내뿜은 김범만 존재했다. 좀 더 성숙해진 모습에서 겸손과 여유가 묻어나왔다.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가 종영한 날 김범은 자신이 연기한 박진성 그대로 나타났다. 붉게 물든 머리칼과 호피무늬의 재킷, 블랙 진… 해맑은 미소는 여전했지만 한 층 날렵해진 얼굴이었다.
김범은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를 통해 스타에서 배우로 거듭났고, 미소년에서 상남자로 변신했다. 여러모로 많은 것을 얻었다. 이렇게 성공을 거두기까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봤다.
# 소년 김범, 되짚어보기
과거로 돌아가 소년 김범을 이야기 하려면 ‘거침없이 하이킥’(2007, 이하 하이킥), ‘꽃보다 남자’(2009, 이하 꽃남)를 빼놓고 갈 수 없다.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연예계에 안착할 수 있게 해줬고, 대표작으로 아직까지 언급되고 있다.
“ ‘하이킥’, ‘꽃남’을 통해 꽃미남 이야기 많이 들었다. ‘꽃남’의 경우 안겨준 게 많지만 짐처럼 남겨준 것도 많다. 당시에 내가 배우인데 한 가지 이미지에 갇히면 안 된다 생각해 ‘드림’, ‘비상’을 출연했다. 여유 없이 이미지 탈피해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되돌아보니 바보 같구나 싶었다. 내가 꽃미남 이미지를 버리려고 해서 버려지지 않고, 또 좋은 이미지를 버릴 필요도 없었다. 이미지에 대한 변화가 아닌 작품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배우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들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지금도 생각이 바뀌고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킥’, ‘에덴의 동쪽’(2008), ‘꽃남’, ‘드림’(2009),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2010)까지 쉼 없이 달렸다. 안방극장에 항상 얼굴을 내비치니 다들 걱정, 근심 따위와 멀 것이라고 예상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10대는 마냥 밝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가정사도 있고 일하면서 우여곡절이 있어서 한(恨)도 많았고 외로웠다. 내가 제일 힘들다 생각했다. 성격이 급해서 빨리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20대 초반까지도 그런 성격이 이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실수도 많았다. 그런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지 않았나 싶다. 실수를 번복하지 않으면 된다”
# 성장통 김범, 그겨울 만나다
연이어 드라마에 얼굴을 내비쳤는데 어느 순간 대중들 앞에 서는 것이 망설여졌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이후 1년 넘게 휴식기를 가지며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됐다.
“생각, 가치관 바뀐 시기다. 작품 고를 때도 마음적으로 여유가 생기더라. ‘하이킥’, ‘꽃남’ 30%가 넘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을 가져다 준 드라마를 하다가 그 이후 흥행적으로 성공 못 한 작품을 하고 1년 반 쉬었다. 다들 위험한 시기에 오래 쉬는 것 아닌가 하더라. 하지만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린 끝에 ‘빠담빠담-그과 그녀의 심장박동소리’를 만났다. 드라마 자체는 종편이라 시청률은 좋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큰 작품이다. 이 드라마를 하면서 11kg 감량하며 외형적으로도 바뀌었다. 하물며 성형설까지 나왔으니까.(웃음) 그때부터 남자답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지금은 그 때보다 8kg이 붙었는데 얼굴이 바뀌었나보다. 시간이 지난 것도 있고…”
그렇게 성장통을 끝내고 ‘그 겨울’을 만났다. 진성을 통해 상남자, 의리남 같은 마초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단어들과 친숙해졌다.
“진성이랑 실제 비슷한 점을 찾으라면 사랑보다 의리를 중요시 하는 점이다. 나 역시 지금은 사랑을 하지 않아서 아마 의리를 선택할 것 같다. 물론 사랑도 잃지 않도록 다른 방법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직설적이고 거짓말 하지 않고, 돌려 말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점은 닮았다. 또 진성이처럼 욱 하진 않지만 다혈질 성격은 있는 것 같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은 상대방이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이며 때때로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실제 그런 일은 많았다.
“오해를 받은 적이 많다.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대화법에 있어 방법론적인 실수를 했던 적이 있다. 그런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교훈을 얻었다. 더 어렸을 때 느끼고 알게 된 것이 지금은 직설적이고 돌려 말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대화법이 생겼다”
‘빠담빠담’을 지나 ‘그 겨울’을 만나며 한 뼘 더 성장했다. 무엇보다 삶에 있어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상기하게 됐다.
“내가 연기를 잘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있지만 얻어가는 것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김규태 감독님 이하 조인성 형, 송혜교 누나, 동생 은지를 얻었다. 지금 나는 내가 사랑하고 믿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살아가는 것 같다. 과거에 내 자신에 대한 믿음, 자기애가 강해서 어디서든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일(연기)에 미련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주위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후로 내가 다른 이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했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 끝까지 손 붙잡고 가고 싶다”
# 남자 김범, 나아가기
이제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지도 8년이 됐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은 멀고도 멀기에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생각이다.
“지금 난 5/42의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마라톤이 42km니까 출발하고 나서 5km정도 온 셈이다. 출발점은 안 보이는데 초반에 전력질주 하다가 3km 지점에서 숨고르기 하고 이제 다시금 발을 옮기기 시작한 느낌이다. 숨고르기 하면서 나를 지지하고 지탱해주는 사람과 손을 맞잡고 누군가를 끌고 당기며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결승전까지가 한 참 남아서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할 것 같다”
결승 테이프는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해 줄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것. 그러려면 좀 더 많은 힘을 길러야 한다.
“어렸을 때, 이쪽일 시작할 때는 어떤 배우와 어떤 감독 이런 연기를 하리라 했는데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연기는 보는 사람 마다 다르고 보는 관점에 다 다르다. 어떤 연기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소중한 사람이 계속 늘어나면서 믿어주는 사람에게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싶다. 지금은 제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은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주위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부족하다.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내 힘이 커질 수 있도록…”
사진=김현철 기자 kch21@sbs.co.kr
손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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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손재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