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뉴스

뉴스 > 사회

[취재파일] 교통·의료사고 손해 배상금이 황당한 이유는?

박세용 기자

입력 : 2013.04.12 13:54|수정 : 2013.04.12 22:08

'한국형 배상 기준' 서둘러 고쳐야…


‘맥브라이드 표’라는 게 있습니다. 이름이 생소한 데요.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이 표의 적용을 받게 될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회사를 못 가거나, 일을 쉬게 될 경우, 혹은 의료사고를 당해 마찬가지 피해를 입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맥브라이드 표의 적용을 받아야 합니다. 난 교통사고를 당해서 수입 손실에 대한 배상을 받았는데, 맥브라이드 표는 못 들어봤다, 그런 분들은 손해배상 사건 판결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표의 존재를 새삼 확인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교통사고 혹은 의료사고 때문에 내 노동능력의 몇 %를 잃어버렸느냐, 우리나라에서 이걸 결정하는 ‘절대 기준’이 맥브라이드 표입니다.

맥브라이드는 미국 정형외과 의사입니다. 표를 만든 건 1936년. 1930년대 미국 백인 남성 노동자의 현실이 맥브라이드 표에 그대로 투영돼 있습니다. 내가 운전기사인데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져서 운전을 당분간 못하게 됐다, 그럼 맥브라이드 표에서 운전기사 직업을 찾아 팔 골절의 경우 노동능력 상실이 몇 %인지 보는 식입니다. 근데 1930년대 케케묵은 기준이 그대로 남아있다 보니, 직업 분류가 이런 식입니다. 계산기 수선공, 공기압축기 기사, 석면 방적공, 햇빛가리개 제조공, 대장장이, 뱃사공, 제분공장의 채 치는 공원… 뭐 이런 식으로 그 옛날 직업 분류가 아직도 나열돼 있습니다.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건 여성 노동자의 경우, 또 1930년대에는 흔치 않았던 성형외과나 피부과 의료사고 피해자의 경우 특히 심합니다. 2009년 강남의 한 성형외과에서 성형수술 결과 안면이 비대칭이 되고 볼이 꺼진 한 20대 여성. 당시 29살이었고 취업하기 전이었는데, 법원이 인정한 수입 손실은 얼마일까요. 3,399만 원입니다. 1년이 아니라, 55년을 더 산다고 가정한 금액입니다. 피해 여성은 얼굴이 망가져 어디 취업하기도 힘들겠다고 절망할 텐데, 어디라도 취업했다면 그래도 연봉 2~3천만 원은 받았을 텐데, 평생 3,399만 원이라니, 황당할 만합니다. 여성은 노동 능력의 25%를 상실했다고 인정받았는데, 근거는 물론 맥브라이드 표입니다. 피해 여성의 변호사와 감정의는 판사가 쉽게 인정하는 맥브라이드 표를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지
2007년에 강남의 성형외과에서 양악수술을 받았다가 입술과 턱이 함몰된 20대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 감각도 떨어지고, 왼쪽 뺨 함몰도 수반됐습니다. 당시 28살이었고 무직이었는데, 일실수입으로 법원에서 인정받은 금액은 4,725만 원입니다. 2039년까지 계산한 것이고, 맥브라이드 표에 따라 노동능력의 13%를 상실했다고 인정받았습니다. 피해 여성은 내가 이 얼굴로 아무 일도 못하게 됐는데, 노동능력의 13%만 상실한 게 무슨 논리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맥브라이드 표가 그 모양입니다. 미국 정형외과 의사 맥브라이드는 여성이 성형 사고로 노동능력을 얼마나 잃어버릴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고민했더라도, 그걸 표에 반영해놓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표를 어쩌다 이용하게 된 거죠. 의료 소송 전문 변호사는 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 부상자들의 노동능력 상실을 계산하기 위해 맥브라이드 표가 한국에 도입됐다고 설명했습니다. 6.25때 쓰던 걸 아직도 판결문에 적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법원이야 기준을 적용할 뿐이고, 보험사나 의사야 사고 피해자가 아닌 이상 아쉬울 게 없고,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겁니다. 변화가 일어난 건 2009년쯤, 대법원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대한의학회에 의뢰해서 맥브라이드 표를 대체할 한국형 배상 기준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2011년에는 작업이 끝나서 대한의학회에서 책도 나왔고, 법원에서 곧 적용할 것처럼, 보도도 잇따랐습니다.

"대한의학회 장애평가기준", 책 제목입니다. 우리나라의 현대 직업 상당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피해 배상 금액은 맥브라이드 표를 적용했을 때보다 올라갈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기준이 나온 지 2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한국형 배상 기준을 적용한 판결문은 지금껏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지금껏 묵히고 있는 겁니다. 의료 소송 전문 변호사한테 물어봐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기준이 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저한테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즉, 2년 동안 모든 교통사고, 의료사고 피해자의 변호사들이 계속 맥브라이드 표만 인용했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이 변호사들이 신체감정을 의뢰한 의사들이 계속 맥브라이드 표만 보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한국형 배상 기준,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대법원은 의료계 내부에 진통이 있어서, 한국형 배상 기준이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정형외과학회 등 의료계 내부에서 대한의학회 장애평가기준에 반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피해 배상 금액이 지금보다 너무 올라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의료계에서 반대 기류가 있는 걸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의료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의사나, 손해 배상금을 직접 지불하는 보험사에 대단히 민감한 이슈입니다. 법원이 한국형 배상 기준을 도입하는 순간, 보험사가 사고 피해자에게 줘야하는 보험금은 순식간에 늘어나게 됩니다. 보험사가 고액의 자문료를 지급하고 있는 신체감정 의사들을(정형외과) 통해 한국형 배상 기준 도입을 조금이라도 늦춰보려고 작업을 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정형외과학회의 설명은 달랐습니다. 보험사나 병원의 경제적 부담 때문에 한국형 배상 기준 도입에 반대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은 부인했습니다. 기준에 모순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쓸 수가 없다는 게 학회 주장입니다. 학회 내부에서 책을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다리가 절단됐을 때 노동능력 상실률이 80%라고 한다, 그때 다리의 다른 부분이 아무리 불편해도 노동능력 상실률이 80%를 넘어가면 안 되는 게 상식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발목 장애가 정말 심각하다, 그래서 표를 보면 노동능력 상실이 83%가 나온다, 이건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인데,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더 말이 안 되는 건, 이 한국형 배상 기준을 만드는데 참여한 정형외과 연구진이 20명에 달한다는 겁니다. 국내 최고의 정형외과 의사들이 모여서 모순 덩어리 가득한 엉터리 기준을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문제가 많아 못 쓰겠다, 이러고 보이콧하는 상황입니다.

교통사고,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현실적인 배상을 받는 과제는 이렇게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법원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사고 피해자의 변호사가 감정의의 자문을 받아 제출한 손해 배상 금액을, 서류를 읽고 인정할지 말지 결정할 뿐입니다. 키는 지금도 의사들이 쥐고 있습니다. 정형외과학회는 모순점을 지적한 걸 정리해 대한의학회에 넘겼다, 대한의학회는 내용을 정리해 올해 안에 '장애평가기준'을 수정할 계획이다, 대법원은 의료계가 수정안을 가져오면 검토한 뒤 실무 재판에 적용할 생각이다, 이렇게 시작은 의료계에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의료계는 자선 봉사 단체가 아닙니다. 언론도, 사고 피해자도, 한국형 배상 기준 수정 작업을 서두르라고, 의료계에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