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충무로 액션 장르의 진화는 곧 류승완 감독의 발자취와 함께한다. 2000년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혜성처럼 데뷔한 류승완 감독은 지난 13년간 한결같이 액션을 중심에 둔 영화를 만들어왔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주먹이 운다'(2005), '다찌마와 리'(2008)나 '부당거래'(2010) 같은 드라마와 코미디, 범죄물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액션은 이야기와 캐릭터를 넘어서는 중요한 구성요소였다.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아라한 장풍 대작전'(2004), '짝패'(2006) 등을 통해 액션의 내공을 갈고 닦은 류승완 감독은 2012년 거대한 작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형 첩보 액션 '베를린'의 작업에 착수한 것이었다.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이 만들어왔던 영화의 평균 제작비 세 배에 달하는 약 100억원이 투입됐다. 몸집 큰 영화라고 돈 걱정 없이 신나게 영화를 찍었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규모가 커진 만큼 완성도와 흥행에 대한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부담감은 개봉 약 한 달 만에 비로소 안도로 바뀌었다. '베를린'은 지난 26일까지 전국 660만 관객을(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을 동원하며 700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는 류승완 감독의 작품 중 최고의 흥행 기록이다. (종전 기록은 '부당거래'로 전국 280만명이었다.)
'베를린'은 개봉과 동시에 관객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인기의 반작용으로서 적지 않은 비판과 지적도 이어졌다. 류승완 감독은 이같은 대중의 반응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관객들의 다양한 비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 이 인터뷰는 '베를린'의 개봉 전 그리고 최근 700만 돌파를 앞두고 만난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작성됐다는 것을 밝혀둔다.)
Q. 언론 시사회 후 대체로 언론 매체들의 호평을 보냈다. 그러나 액션은 만점, 이야기는 다소 아쉽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A. 우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9개의 반응이 극찬이더라도 1개가 악평이면 그게 더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이야기가 허술하다는 지적이 가장 신경쓰였다. 이야기 구조를 탄탄하게 하려고 오랜 시간 공을 들였는데 그 부분이 단점으로 지적됐다는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더다.
Q.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6,500만 원이라는 저예산으로 찍은 것을 비롯해 대부분 액션영화를 작은 예산으로 기가 차게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제작비가 무려 100억 원이다.
A. 100억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베를린' 한 게 아니라, '베를린'을 준비하다 보니 이 제작비가 든 거다. 돈이 없으면 이 영화가 이상할 것 같으니 판이 커진 거지. 제작비가 많이 들었으니 흥행에 대한 압박도 크고, 좀 복합적인 걱정이 들더라.
Q. 복합적인 걱정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A. 개봉 전 잠을 설치면서 궁금해했던 것은 이렇게 한치의 유머도 없이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과연 대중들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였다. 100억 규모의 영화라면 관객들이 원하는 기대치 같은 것이 있지 않나. 박진감 넘치는 액션, 적시 적소에 터지는 웃음, 눈물 쏟아내는 신파 같은 요소들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영화는 비껴가는 부분이 있지 않나. 난 이렇게 만드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관객들은 어떻게 보실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다.
Q. 그렇다면 이젠 대중의 시각으로 넘어가서 '베를린'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접하면서 가장 충격적이었거나 의외였던 건 어떤 것이었나?
A. 솔직히 말해 일부 관객의 비판들을 보면서 '날 이렇게 싫어하나'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물론 영화를 좋게 보고 나쁘게 보고는 관객의 자유다. 그런데 내 영화를 나쁘게 본 사람들이 좋게 본 사람들까지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베를린'을 보고 실망했다는 사람들 몇몇은 '류승완이 변했다', 'CJ 투자로 영화 만들더니 뻔해졌다' 이런 비난을 하기도 하더라. 그런 평가에 동의 할 수 없는 건 나도 아직 내 스타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따지고 보면 '짝패'도 CJ엔터테인먼트의 투자, 배급으로 만들었고, '다찌마와 리'도 쇼박스가 전성기일 때 제작한 영화다.
그러나 내 영화를 잘 알고 좋아하는 관객들이 남긴 납득할만한 논리의 리뷰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다음 작품을 만들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Q. 관객들이 지적한 영화의 세부 내용에 대해 한번 물어보겠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초반 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인물과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너무 복잡하고 산만하다는 의견이었다. 반면 후반부의 갈등과 감정 구도는 굉장히 단순해진다는 지적도 있었다.
A. '베를린'의 스토리는 어떤 인물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표종성(하정우 분)과 련정희(전지현 분)를 축으로 따라가다 보면 멜로 드라마, 표종성(하정우 분)과 동명수(류승범 분)를 중심으로 따라가다 보면 배신과 음모의 드라마. 표종성(하정우 분)과 정진수(한석규 분)를 놓고 보면 우정에 관한 드라마다. 전반 한 시간을 어떻게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나머지 한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
Q. 한국판 '본 시리즈' 같다는 건 칭찬일 수도 비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A. '본'과의 비교는 영광이다. 한 시대의 핵을 그은 영화 아닌가. 액션 신의 경우 '본 시리즈' 보다는 '히트'의 시가 총격신을 교본처럼 삼았다. 미국 프로듀서에게 들은 얘긴데 미국 액션 영화의 스턴트 팀 대부분이 '히트'의 액션을 교본으로 쓴다고 들었다. 그 영화 속 장면이 실제 시가지에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더라. 액션 신을 구성할 때, 총격전을 포함해서 리얼리티에 최대한 중점을 뒀다.
사실 첫 장면에서 등장한 호텔은 실제 본 시리즈에도 나온 호텔이다. 어떤 관객들은 영화 후반부 갈대밭에서의 액션 신을 보면서 본 시리즈가 생각난다고 하는데 그 장면은 '프라임 컷'(1972)이라는 마이클 리치 감독의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Q. 일부 블로거와 네티즌들은 '차일드 44'라는 소설과의 유사성까지 거론하고 있는데?
A. 원래 '베를린'의 출발은 어린 시절 '암굴왕'이라고 불렀던 책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었다. '부당거래' 후반 작업 중에 완역본으로 나온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면서 스파이들의 이야기를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냉전 시대 종식 후를 배경으로 한 산업 스파이 영화 말이다.
그러다가 현재의 정치 현실과도 맞닿아있는 현실감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북한을 배경으로 한 '몬테 크리스토 백작'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제3국의 통제된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스파이의 이야기까지 발전하게 됐다. 트리트먼트 단계에서는 완전히 북한 사람만 나오는 이야기였는데 주변에서 '이게 과연 가능하겠냐'고 하더라. 그래서 해결사 역할을 할 남한 쪽 캐릭터 '정진수'(한석규 뷴)를 만들어낸 것이다.
Q. 굳이 따지자면 영화보다는 소설에서 더 많은 모티브를 얻는 편인가?
A.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받은 사람들이 액션의 유사성 때문에 '본 시리즈'를 언급하지만, '본 시리즈’도 영화보다는 ‘제이슨 본’이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더 자칼’과 대결하는 원작 소설의 에피소드에 더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 ‘마이클 해머’ 시리즈와 같은 미국의 터프한 탐정물에서 보이는 인물묘사도 도움이 많이 됐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생동감 있는 묘사나 암호해독 방식 등의 사실성 이런 부분에 영감을 많이 줬다. 플롯 구성에 영향을 준 영화를 꼽자면 '본 시리즈'보다는 '인셉션', '다크 나이트'같은 영화 였다. 이 영화 속 다층적인 레이어 방식을 '베를린'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Q. 지하철 브란델부르크역에서 싸우는 장면도 그렇고, 후반부 갈대밭에서의 액션 신도 그렇고 특이한 공간에서의 액션들이 인상적이었다. 공간 설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A. 로케이션 헌팅을 다닐때 유럽의 다양한 건축 구조를 보면서 액션에 대한 아이디어가 많이 파생됐다. 이 공간에서는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할까 하는 식으로 상상을 하면서 액션신들은 만들어갔다. 항상 내 영화에서 공간은 액션의 출발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Q. 결말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애초에 생각한 결말은 지금의 내용과 달랐다고 들었다.
A. 원래 생각한 결말에서는 련정희가 죽지 않는다. 표종성이 련정희를 구출하는데 성공하지만 만신창이가 되고, 정진수는 두 사람이 다 죽은 걸로 위장하고 이들을 보내는 내용으로 구상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건 소수들만이 좋아할 것"이라고 하더라. 결국 뜨겁게 끌어오르다 쿨하게 끝내는 것을 선택했다. 애초에 속편은 생각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Q. 700만 돌파를 앞두고 있다. 개인 작품들 중 최고의 흥행작이 되긴 했지만 평론가나 기자들이 기대한 흥행 수치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도 있다. 아쉽지는 않은가?
A. 만족스럽다. 손익 분기점을 넘겼고, 다음 영화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됐다는 것이 기쁘다. 내 나이가 올해로 41살인데 만약 이 나이에 1,000만이 넘고 그 이상의 기록을 세웠다면, 다음 작품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부담이 됐겠느냐. 관객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이같은 성적은 낸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Q. 류승완 감독하면 한국 액션 영화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만큼 액션이라는 장르 안에서 이뤄낸 성과가 상당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팬들은 류승완의 액션 외에 다른 장르에 도전하는 모습도 보고 싶어한다. 이를테면 멜로 영화 같은 것 말이다.
A. 나는 '베를린'이 멜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 두 캐릭터의 이별 장면이 감정적으로 큰 잔상을 남기는데 그게 내 취향의 멜로 영화인 것이다. 솔직히 장르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다. 나에겐 무슨 장르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지 또 어떤 사건들이 발생하고 흘러가느냐에 관심이 있다.
장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떤 컨벤션 안에서 영화를 만든다거나 자신을 장르의 틀에 가두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매 작품을 할 때마다 다른 인물, 배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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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레몬트리 제공>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