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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피도 눈물도 없는 욕망의 진흙탕(리뷰)

김지혜 기자

입력 : 2013.02.13 12:52|수정 : 2013.02.13 12:52


영화 '신세계'(감독 박훈정, 제작 사나이 픽처스)는 충무로가 그간 시도해온 누아르(noir : 프랑스어로 '검은 영화'라는 뜻. 어둡고 잔인하며 폭력적인 범죄와 타락의 도시 세계를 그린 영화를 일컫는다)라는 장르에서 있어서 확고한 진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범죄 조직의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다룬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 칼부림이 넘쳐나는 그저 그런 조폭 영화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엔 각자의 욕망을 향해 돌진하는 수컷들의 이전투구가 그 어떤 심리 드라마보다 밀도 있게 펼쳐지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를 집필하며 충무로의 특급 스토리 텔러로 주목받았던 박훈정 감독은 자신의 두번째 연출작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된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 등은 감독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영화를 빛내는데 혼신의 열연을 펼쳤다. 

'신세계'는 국내 최대 범죄조직에 잠입한 형사와 그를 둘러싼 경찰, 범죄조직을 배경으로 세 남자 사이의 음모와 배신, 의리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펼쳐나간다.

경찰청 수사 기획과 강과장(최민식 분)은 국내 최대 범죄 조직인 '골드문'이 기업형 조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자 신입경찰 이자성(이정재 분)에게 잠입 수사를 명한다. 조직의 명령에 따라 골드문에 잠입한 자성은 8년 만에 ‘골드문’의 2인자이자 그룹 실세인 정청(황정민 분)의 오른팔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골드문 회장이 갑자기 사망하게 되고, 강과장은 후계자 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신세계' 작전을 설계한다. 작전의 성공만 생각하는 강과장은 계속해서 자성의 목을 조여만 간다. 그러나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 처한 자성은 언제 자신을 배신할지 모르는 경찰과 형제의 의리로 대하는 정청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한다.이미지
‘신세계’는 범죄 조직에 잠입하는 형사라는 소재 탓에 홍콩 영화 '무간도'를 떠올리게 하지만, 작품을 보기도 전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주먹과 피, 의리와 배신으로 점철된 조직 구성원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를 전복시킨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착한 놈은 없다. 그저 이기는 놈과 지는 놈이 있을 뿐이다. 영화는 욕망이라는 정서를 가진 인간은 그 누구도 착하지 않다는 전제 아래 살벌한 이야기를 펼친다.

시나리오를 잘 쓰기로 소문난 감독의 작품답게 '신세계'는 이야기가 상당히 촘촘하게 구성돼있다. 영화는 초반 골드문과 그 대척점에 있는 경찰의 조직 내부를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며 관객의 흥미를 돋우고, 중후반부부터는 양 집단의 교집합인 이자성이라는 인물을 통해 심리적 긴장감을 형성한다.

때때로 스토리는 어딘 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그러나 '신세계'는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를 전면에 배치하면서 인물의 행동과 대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힘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보여준다.

반복된 클로즈업과 줌인, 줌 아웃의 남발이 세련된 연출 방식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지만, 인물의 심리 상태를 스크린 밖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 작품에서 만장일치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수 있는 요소는 배우들의 완벽에 가까운 앙상블이다. 인물 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몇몇 장면은 배우들의 폭발적인 열연 덕분에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영화를 끌어가는 이정재, 황정민, 최민식은 각기 다른 캐릭터를 각각의 스타일로 연기해 나가는 덕분에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황정민은 뼛속까지 살벌한 건달이지만, 의리에 대한 일말의 순정을 간직한 조폭 '정청'으로 분해 생동감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몇몇 관객들을 ‘정청’을 보며 과거 그가 '달콤한 인생'에서 연기했던 '백사장'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청'은 '백사장'의 답습이 아닌 업그레이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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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역시 '신세계'를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영화 초중반까지는 캐릭터가 처한 상황과 성격 때문에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중반 이후의 극적인 반전을 통해 배우 이정재의 본색을 제대로 드러낸다. 최민식은 정청과 자성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탓에 받쳐주는 연기에 집중하지만, 물과 불을 오가듯 두 배우와 자연스럽게 섞이며 하모니를 이룬다.

또, 한 명 '신세계'가 발견한 보물은 배우 박성웅이다. 드라마에서 젠틀한 이미지로 주목받았던 박성웅은 이번 영화에서 골드문의 3인자 '이중구' 역을 맡아 황정민에 뒤지지 않는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신세계'의 강점이자 약점은 숨 막히는 비장미다. 인물 간의 물고 물리는 암투는 유머의 빈틈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이어진다. 또 누아르라는 장르의 특성상 잔인한 폭력과 넘치는 피는 불가피하다. 그 과정에서 엘리베이터나 건물 내부 같은 폐쇄 공간에서의 액션신을 박진감 있게 연출하면서 따로 떼어놓고 봐도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장면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작가 출신의 감독은 직접 메가폰을 잡으면서 영화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섬세한 조련 솜씨를 보여줬다. 주연 배우 뿐만 아니라 조연, 단역에 이르는 배우 기용 또한 심혈을 기울였고, 액션 안의 드라마를 심어놓은 균형감도 돋보인다.

박훈정 감독이 말한 바로는 '신세계'는 그가 애초 구성한 스토리의 중간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프리퀼(prequel: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과 시퀼(sequel: 속편)에 대한 야심도 드러냈다.

물론 속편 제작 여부는 본인의 의지보다는 흥행 성적이 좌지우지 하겠지만, '신세계'를 본 관객 대부분은 분명히 이 영화의 앞선 이야기 혹은 뒤따를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쏟아낼 것이다. 2월 21일 개봉. 러닝타임 134분. 청소년 관람불가.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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