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거장 감독 레오 카락스가 신작 '홀리 모터스'의 개봉을 앞두고 4년 만에 내한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을 통해 1990년대 초반, 국내에 프랑스 예술 영화의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던 레오 카락스는 '폴라 X'(1999) 이후 무려 13년 만에 장편 영화 '홀리 모터스'를 발표했다.
이 영화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을 뿐 아니라 프랑스 최고 권위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뽑은 '2012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된 수작이다.
4일 오전 서울 남대문구 회현동의 프랑스 문화원에서 열린 내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카락스 감독은 "한국에 3~4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대부분 영화제나 특별전에 관련된 일정이라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서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신작 '홀리 모터스'는 리무진을 타고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하루 동안 아홉 번의 변신을 하는 오스카씨의 하루를 그린 작품으로 카락스 감독의 페르소냐로 불리는 드니 라방이 주연을 맡았다.
카락스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그동안 준비하던 영화들이 제작비가 여의치 않아 제작이 중단된 경우가 많았다. 이번 작품은 런던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파리에서 디지털로 찍었다"고 말했다.
'홀리 모터스'는 카락스 감독의 종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이미지가 등장하고 그 이미지들은 많은 상징성을 띄고 있다. 카락스 감독은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대부분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에 답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면서 "나는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영화를 통해서 표현할 뿐"이라고 말했다.
카락스 감독은 누벨 이마주(새로운 이미지를 추구한 1980년대 프랑스 영화 감독들의 작품 경향을 일컫는 말)의 대표주자로서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부터 '퐁네프의 연인들', '나쁜 피' 등의 대표작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확립해왔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 몇 개의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를 구상한다"면서 "'홀리 모터스'의 경우 3개의 강렬한 이미지에서 이야기를 확장시켜 나갔다"고 밝혔다.
카락스는 "첫번째 이미지는 우리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영화관에 앉아있는 관객들의 모습이다. 카메라는 관객을 정면으로 담고 있는데 화면 속에 담긴 관객의 모습은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잠이 든 것 같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돼 집안에 있는 한 사람 바로 내가 등장하고 바로 영화의 주인공인 오스카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두번째 이미지는 '리무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부터 긴 리무진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리무진은 버려진 장난감 같은 이미지도 있는 반면, 컴퓨터 혹은 인간의 아바타와 같은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대부분 사람들은 리무진을 사지 못하고 대여하는데, 리무진을 타면서 부자인 척 행동한다. 한마디로 리무진은 아바타 같은 역할을 한다. 밖에서 보이지 않는 리무진 내부의 모습을 주인공 오스카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세번째 이미지는 리무진을 탑승하고 있는 드니 라방의 모습이었다. 카락스 감독은 "리무진을 타고 삶에서 삶으로 여행을 다니는 드니 라방의 모습이 떠올랐다"면서 "오래 전부터 파리의 다리 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노파의 삶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을 담는데 내 인생 전체를 허비할까봐, 영화를 찍기로 했다. 그 역할을 드니 라방에게 시킨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화의 주인공인 오스카로 분한 드니 라방은 배우 인생 최고의 열연을 펼쳤다. 카락스 감독의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에 출연하며 프랑스 영화계에 데뷔한 드니 라방은 카락스 감독의 영화에선 야생의 매력과 신비로움이 한껏 묻어나는 캐릭터를 연기하곤 했었다. '홀리 모터스'는 그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드니 라방은 이 영화에서 9명의 캐릭터로 분하며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열연을 펼쳤다.
카락스 감독은 드니 라방에 대해 "젊은 시절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준비할 때 배우 구직소에서 처음 만났다. 강렬한 외모가 잊혀지지 않아 캐스팅했다. 그는 나와 동갑이고 키도 비슷하다. 작품 외적으로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점점 더 좋은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면서 "이제는 못하는 역할이 없다. 나는 이번 영화의 9개의 캐릭터 중 두 역할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는 훌륭히 해냈다"고 극찬했다.
1984년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통해 프랑스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카락스 감독은 지난 30년간 5편의 장편 영화밖에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다작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공백의 이유는 금전적인 부분이 크다. '퐁네프의 연인들', '폴라 X' 모두 제작 당시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전적인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다작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다. 카락스 감독은 "여유가 있다고 해도 다작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비슷한 영화를 찍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다양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13년간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레오 카락스 감독은 자신의 색깔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으로 전세계 영화 마니아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신작 '홀리 모터스'는 영화를 만드는 행위를 하는 창작들에 대한 혹은 연기를 하는 모든 배우를 위한 아름답고도 슬픈 찬사와 같은 영화다.
카락스 감독의 농익은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홀리 모터스'는 오는 4월 국내에 개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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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사진=김현철 기자 khc21@sbs.co.kr)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