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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비운의 굴레' 못 벗어난 풍운아 조성민

입력 : 2013.01.06 09:55|수정 : 2013.01.07 10:09


6일 숨진 채 발견된 전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40)은 탁월한 재능에도 굴곡 많은 인생 탓에 꽃을 피우지 못한 '비운의 스타'로 꼽힌다.

신일고등학교와 고려대를 졸업한 그는 194㎝의 당당한 체구에서 뿜어내는 강속구를 앞세워 임선동, 박찬호, 차명주 등과 함께 '황금의 92학번'으로 불리며 큰 기대를 받았다.

1996년 고려대를 졸업하면서 계약금 1억5천만엔을 받고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다시 한번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후 그의 야구 인생은 끝없는 굴곡의 연속이었다.

1997년 7월 처음 1군 무대에 올라 주로 불펜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1998년 본격적으로 선발로 나서 재능을 만개하는 듯했다.

6월까지 7승으로 다승 공동 1위에 오르는 등 투수 각 부문에서 상위에 올랐고 완봉승 3번, 완투승 2번 등 홀로 팀 승리를 견인하며 요미우리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

그해 조성민은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에 선발됐고,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갑작스러운 난조에 빠져들더니, 부상까지 겹쳐 더는 승수를 추가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1999년 팔꿈치 수술을 받은 이후 기나긴 부상과의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2002년 요미우리를 떠났다.

그는 일본에서 4시즌 통산 11승10패와 10세이브, 평균자책점 2.84를 남겼다.

그라운드 바깥의 인생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2000년 톱스타인 고(故) 최진실씨와 결혼해 숱한 화제를 뿌렸으나 불화를 거듭하다가 2004년 파경을 맞았다.

그 과정에서 폭행 등 논란이 꼬리를 물었다.

제빵 사업가와 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던 그는 2003년과 2004년에는 연달아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 신청서를 제출해 국내 프로야구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끝내 '고려대 조성민'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조성민은 2005년 '재활 공장장'이라 불리던 김인식 전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에 깜짝 입단했다.

그러나 전성기의 구위를 되찾지 못한 그는 2007년까지 3년 동안 35경기에 출장해 3승4패와 평균자책점 5.09를 남긴 채 글러브를 벗었다.

이후 방송 해설가로 나서기도 한 조성민은 2011년 두산의 부름을 받고 2군 코치로 새 출발, 지난해 말까지 선수들을 지도했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며 재기와 새 출발을 거듭해 '풍운아'로 불린 그는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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