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한 중학교 3학년 교실 풍경입니다. 학생들이 6명씩 조를 이뤄 책상을 모아놓고 그 주위에 둘러 앉아 있습니다. 모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크레파스로 열심히 그림을 그립니다. '미술 수업인가? 그런데 수채화도 아니고 웬 크레파스?'하고 생각하는 순간, "자, 이제 그리고 있는 그림을 오른쪽 친구에게 전달하세요." 지도 교사가 지시합니다. 일제히 그리다 만 그림을 옆사람에게 주고 넘겨 받은 그림을 이어서 다시 그립니다.
처음 느낌은…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미술시간에 할 만한 일이 아닐까? 중학교 3학년이면 인생에 대해 웬만큼 안다는 생각에 이런 일을 유치하다고 싫어할텐데. 그런데 학생들은 서로 그리는 그림을 보며 까르르, 까르르 웃음보가 터집니다. "야, 내 명작을 다 망쳐놓고 있잖아." "내 그림이 안드로메다로 가고 있어." "여기다 클럽 조명을 달아놓으면 도대체 어떻게 이어 그리라는 거야." 대화의 내용은 원망 일색인데 얼굴은 재미있어 어쩔줄 모르겠다는 표정입니다. 결국 처음 그리기 시작한 학생에게로 돌아온 그림. 그림에 나름의 이야기를 입히기 위해 열심히 마무리합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은 하나 같이 기상천외하거나 엉뚱한 이야기 뿐입니다. 당연합니다. 애초에 구상했던 그림이 친구의 손을 거치고 거쳐 되돌아오면 전혀 다른 그림이 돼있으니. 하지만 학생들의 얼굴은 만족감으로 가득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상상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그림이 더 신선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또 다른 반에서는 커다란 도화지 위에 한 학생이 벌렁 드러누워 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몸의 가장자리를 따라 친구 신체의 본을 뜹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체 모양 위에 학생들은 꿈을 펼쳐놓습니다. '20년 후 우리들의 모습은 어떨까?'를 그리는 것입니다. 두 조로 나뉘어 한 조는 병원을 배경으로 정장을 입고 있는 의사로 꾸밉니다. 현실주의자들입니다. 한 손에는 돈다발도 들었습니다. 반지도 4개씩이나 꼈습니다. 조원인 학생들은 그 하나하나를 웃고 떠들며 상의하면서 결정하고 그립니다. 일반 넥타리를 매자, 아니다 특별해보이게 나비 넥타이를 매자, 나비 넥타이를 맨 의사를 본 적 있느냐. 사소한 결정에도 격론이 벌어집니다.
나머지 한 조는 수영복을 입은 남자를 그립니다. 해난구조요원이랍니다. 낭만주의자들입니다. 신체 본을 뜨고 보니 허리선이 섹시해서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가장 어울리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논의 끝에 한 쪽 팔에는 문신이 그려집니다. 양아치의 풍모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주제는 '미래의 내 모습'으로 거창하지만 학생들에게 도대체 심각함이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신나게 웃고 떠드는 한바탕의 난장입니다.
위에서 묘사한 교육은 교육과학기술부가 학교 폭력 치유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방안으로 추진하고 있는 '어울림'이라는 프로그램 모습입니다. 물론 더 다양한 활동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상기한 분위기와 내용의 교육이 대부분입니다. '어울림' 프로그램을 취재하기 위해 대전 법동 초등학교까지 가는 길에 저는 그렇게 상상했습니다. 학생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바꿔놓기 위해 영혼을 흔들어놓을 만큼 뭔가 감동적인 프로그램이겠지. 그런데 직접 본 결과 전혀 아닙니다. 딱딱한 인생 설교와 도덕 교육은 단 1분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저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대화하고 웃음을 나누고 교감과 소통하는 장을 마련해줄 뿐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좀 유치해보이는 놀이를 통해서 말이죠. 이 중학교 3학년생 약 240명에게 '어울림'을 실시하기 위해 투입된 미술 치료 상담사는 모두 32명입니다. 모두 관련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들입니다. 이틀 동안 하루 6시간씩 12시간 이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그들은 이 프로그램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결국 학교 폭력은 소외의 문제입니다. 경쟁만 강조돼 모두가 내가 눌러 이겨야할 대상으로만 여겨지다보니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이해를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웃고 떠들다보면 아, 얘한테도 나와 비슷한 고민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이런 겉모습 속에 이런 내면을 갖췄구나 알게 되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학교 폭력의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이런 모든 차별이 없어지면서 주변에 높이 쌓여있던 소통의 벽이 허물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12시간의 교육만으로 모든 소통의 벽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워낙 소통을 시도할 계기조차 없던 아이들이다 보니 아주 기초적이고 어린 수준의 놀이를 통해서도 '어울림'의 기쁨과 즐거움을 사뭇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적어도 내 주변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 학교는 이 짧다면 짧은 시간의 '어울림' 프로그램을 통해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선원 대전 법동중학교 교장의 설명입니다.
"지난해 초 이 학교에 처음 부임했을 때는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학교 안에 질서라고는 찾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살핌을 많이 받지 못한 학생들이 많다보니 거친 태도의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지난 해만 해도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무려 22번이나 열렸습니다. 주변 다른 학교들이 1년에 평균 2~3차례 여는데 말이죠.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교육과학기술부와 대전 교육청에서 이 '어울림 프로그램'을 시범 실시할 학교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조건 손을 들었습니다. 우리부터 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올 6월 1학기에 지금 이 선생님들이 오셔서 1차로 2학년 학생 전체를 상대로 똑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끝나고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정말 단 한명도 빼놓지 않고 너무 재미있었다고 또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옆에 있는 반 친구들에 대해 잘알게 됐다'거나 '서먹하던 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올 상반기에도 6번의 학교폭력자치 위원회가 열렸는데 이 프로그램을 실시한 뒤 2학기에는 단 한건만 열렸습니다. 저도 학교의 분위기가 뭔가 달라진 것이 느껴집니다. 아직 거친 아이들도 있고 말 안듣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질서가 잡혀가는 느낌이랄까요."
무엇보다 제가 '어울림' 프로그램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학교폭력'의 문제를 교육으로 풀려한다는 점입니다. 올해 들어 우리 교육현장은 학교폭력과 관련해서 학생부에 기록할지, 말지를 놓고 소모적인 논쟁과 싸움만 벌여온 느낌입니다. 마치 암환자를 치료하는 의료팀이 항암제를 주사로 투입할지, 복용시킬지를 놓고 주먹다짐을 벌이는 꼴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투약 방법보다는 약의 내용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학교폭력 문제의 해법도 어떻게 처벌할지 보다는 어떻게 교육시킬지에 있습니다. 학교폭력의 문제는 결국 학교와 교육의 왜곡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울림 프로그램은 올해 전국 30개 학교에서 실시됐다고 합니다. 다양한 배경의 전문 상담사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해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기대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둬 내년에는 50개 학교에 확대 실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특히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해 '일진경보학교'로 지정된 곳에 우선적으로 적용할 방침입니다. 부디 교과부가 '어울림 프로그램'을 잘 발전시키고 체계를 갖춰 내년에는 '어울림'의 기쁨을 알게 된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더 많은 학교에서 터져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