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국산 전차를 표방하는 K2 흑표 전차의 '심장'인 파워팩(엔진+변속기)이 국산화를 추진하다가 갑자기 독일제를 쓰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기막힌 일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방위사업청(이하 방사청) 넘버 1, 넘버 2의 인물들이 "국산 파워팩 완벽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기묘한 시험방법을 들이대 국산 파워팩을 '고철'로 둔갑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된 겁니다.
"국산 파워팩, 99점 이상이다"방사청은 작년 11월 3일 서울 모처에서 국방부 출입기자들을 초청해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기자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K2 흑표 전차의 국산 파워팩 개발 현황이었습니다. 그즈음 국산 파워팩은 시험평가 44개 평가항목 가운데 냉각팬 속도제어, 냉각시험 최대출력, 가속성능 등 3개 항목에서 '기준 미달'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국산파워팩의 기준 미달 성능에 대한 기자와 방사청 고위관계자들의 대화가 오갑니다. 그때 오간 대화 중 핵심적인 것만 추려보겠습니다.
-기자 : "국산 파워팩의 세가지 미달 성능이 K2를 운용하는데 핵심적인 건가요?"
-방사청 사업관리본부장 : "냉각팬 속도제어, 냉각시험 최대 출력, 가속성능이 그것인데 100점 만점에 95점 이상은 다 나옵니다. 저희가 보기엔 이게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노력 많이 했고, 그 결과 100점 만점에 저는 95점 이상 주고 싶습니다."
-방사청장 : "99점 이상은 되는데… 본부장 평점이 너무 짠 것 같아"
국산 파워팩에 99점 이상의 점수를 주고 싶다면 그 성능이 완벽하다는 겁니다. 99점 이상이니 거의 100점이란 뜻입니다. 게다가 방사청의 수장인 방사청장이 기자들을 앞에 두고 그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고위 공무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사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고위 공무원인 방사청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 다음날 'K2 전차 심장, 국산화하기로'라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방사청은 이런 기사들에 대해 아무 대응도 안했습니다.
그리고 넉달 뒤…벼락처럼 진행된 '가혹 시험'
그 일이 있고 난 뒤 국산 파워팩에 대한 평가는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이상한 일은 3월 들어 벌어집니다.
기동능력, 수직장애물 통과능력 등의 시험평가가 한창 진행되던 3월 둘째주 수요일인 3월 14일 오전, 방사청은 국내 파워팩 개발업체들에게 전화로 통보합니다. "오늘 당장 엔진 8시간 연속 가동시험을 해라."
국내업체들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고속으로 엔진을 8시간 돌리는 시험을 아무 준비 없이 당장 하라니" "연일 과속으로 시험 운행을 하느라 차체와 파워팩의 피로도가 심각한 수준인데...단단하다는 전차 엔진이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퍼질 것이 분명한데…"
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생명줄'을 쥔 방사청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방사청의 전화를 받고 1시간 반 뒤에 '너덜너덜'해진 파워팩을 가지고 시험에 돌입합니다. 결과는 예상대로 였습니다. 3~4시간 지난 뒤 파워팩이 멈췄습니다. 연일 계속된 과속주행으로 엔진오일이 부족한 상태에서 가혹한 시험을 한 결과 엔진 메인 베어링이 손상된 겁니다. 게다가 방사청은 최고 속도가 시속 70km인 전차를 내리막 길에서 74~75km로 달리게 했습니다.
방사청은 K2 전차가 멈출 때 즈음에야 "8시간 연속 주행 평가를 하자"는 공문을 국내 업체들에게 보냈습니다. 공문은 "이의가 있으면 3월 15일 08시 이전에 의견 제출하라"는 황당한 주문도 있었습니다. 벌써 시험 치르게 해놓고...기계는 이미 멈춰섰는데...그제사 공문 보내서 이의 있으면 하루 뒤에 의견을 내라니.
뭐가 그리 급했기에 공문도 안보내고 전화로 가혹한 테스트를 통보했을까요. 방사청은 "국내업체들이 8시간 연속주행 시험에 동의했기 때문에 합의하에 테스트했다"고 밝혔습니다. 국내업체들은 "방사청이 하자고 하길래 합의는 해줬다"고 밝혔습니다. 그말이 그말 같지만 뉘앙스가 참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보름 뒤…
이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전 취재파일에서도 지적했지만 독일제 파워팩에는 해보지도 않은 엔진 8시간 연속 주행시험을, 국산 파워팩에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켜놓고 고장나니까 '몹쓸 고철'로 평가한 겁니다. "100점 만점에 99점 이상"이라던 방사청장의 말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한 걸까요?
8시간 연속 주행이 실패로 돌아가고 보름 남짓 뒤인 4월 2일 군 당국은 방위사업추진위원회(방추위)를 열었습니다. 이 위원회에서 국산 파워팩은 "중대 결함 아니다"라는 의견이 8대 5로 많았는데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독일제 파워팩을 K2 흑표에 탑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정감사 기간인 지난달 22일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들이 국내 파워팩 업체를 방문해 현장 조사를 했습니다. 국방위원회 위원장인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은 "국내 업체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니 방사청의 보고와는 너무 다르다"며 '예산 심의를 할 때 양쪽 얘기를 들어보고 결론을 내리겠다"고 밝혔습니다. 감사원이든 국회든 국산 파워팩 개발의 비밀을 조속히 밝혀주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