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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 태교책은 '열녀전'"

입력 : 2012.09.06 09:52

정해은 한중연 선임연구원 '조선시대 태교' 분석
"태교는 가문의 흥망성쇠와 직결"


"선사를 잉태한 날부터 예절을 지키고 행동을 삼가했으며 경전을 외우는 것으로 태교를 했는데 태어나는 때에 보니 과연 평범하지 않았다." 통일신라 시대 활약한 승려 원랑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890년)에 새겨진 글이다.

여기서 단연 눈길을 끄는 단어는 '태교'(胎敎).

태교는 신라시대 선사들의 비문에 자주 등장한다.

낭혜화상의 탑비(890년)에도 "꿈에서 서역의 도인이 나타나서 스스로 법장이라 하면서 10계(戒)를 주면서 그것으로 태교를 하게 했다"는 글이 적혀 있다.

태교(胎敎)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태교는 "가문의 흥망성쇠와 직결된 매우 중요한 사안"이 된다고 말했다.

정 선임연구원은 8일 한국여성사학회에서 발표하는 연구 논문 '조선시대 태교(胎敎)의 담론과 전파'에서 조선시대 태교 문화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태교가 전파되고 확산됐는지 분석했다.

조선시대 태교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문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소혜왕후의 '내훈'을 비롯해 송시열의 '계녀서', 허준의 '동의보감', 이사주당의 '태교신기', 이이의 '성학집요' 등 많은 문헌에서 태교에 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학자들이 태교를 언급한 내용은 흥미를 자아낸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 명인 송시열은 태교에 대해 "자식 가졌을 때도 잡 음식 먹지 말고 기울어진 자리에 눕지 말고, 몸을 단정히 하면 자식을 낳으면 자연 단정하니라"고 했다.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태교 관련 내용의 대부분은 중국 '열녀전'에 근거한 것으로, '열녀전'은 조선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태교책이었다.

'열녀전'은 중국 한나라 학자 유향이 여성 106명의 행적을 기록한 책.

'열녀전'에는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의 어머니가 한 태교 내용을 비롯해 태교 방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옛날에는 부인이 아기를 잉태하면 모로 눕지 않고 모서리나 자리 끝에 앉지 않았으며, 외다리로 서지 않았고 거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자른 것이 바르지 아니하면 먹지 않았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며 앉지 않았다.

현란한 것은 보지 않았고 음란한 음악은 듣지 않았다.

밤에는 눈먼 악관(樂官)에게 시를 읊게 하였고 올바른 이야기만 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아이를 낳으면 모습이 반듯하고 재주와 덕이 남보다 뛰어난 법이다." 정 선임연구원은 "중국의 태교론은 유교 및 불교, 도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주로 의학적 차원의 태교론으로 발전한 반면 한국에서는 중국 한대(漢代)에 형성된 유가적 태교론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강한 도덕적 성격을 띠었다"고 설명했다.

'유교의 나라'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자신의 몸이 아니라 가족의 몸이었다.

태교 역시 여성의 부덕(婦德)의 하나로 권장됐다.

정 선임연구원은 "조선시대에 태교는 사회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면서 "태교란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한 임산부의 마음과 몸가짐이자 집안을 이을 바른 자식을 낳기 위한 실천 방안의 하나로서 집안의 흥망성쇠와 연결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고 분석했다.

유아 사망률이 높은 조선시대에 건강한 아이의 출산은 가족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며, 집안을 이을 '바른 자식'을 낳기 위한 실천 방안의 하나로 집안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것이다.

정 선임연구원은 "무엇보다 태교가 조선사회에서 중시된 것은 태교를 실행해 낳은 아이는 커서 '군자'로 자랄 것이며 군자로 자란 아이는 집안을 빛낼 수 있는 재목이 되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면서 "이 때문에 태교는 개인 및 가족의 관심사로 각종 의학서나 여성교훈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 권장됐고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자리잡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