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애플 사이의 소송전에 대한 보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그리고 소송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워낙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소송이 진행 중인 데다가 제일 규모가 큰 미국에서의 소송의 경우 우리와 너무나 다른 사법체계 때문에 일반 시청자, 독자로서는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법조를 비교적 오래 출입했고 나름 미국법 공부도 좀 했다는 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평결이 나오자마자 판결이 확정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다가 뒤늦게 판사가 뒤집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왔다갔다하면서 혼란을 부추기는 보도들도 많았습니다.
미국과 우리의 사법체계 가운데서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배심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법권이 주와 연방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소송에서는 주로 배심제 관련한 부분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번 소송은 연방법 위반 여부를 다투는 것으로 연방지방법원이 1심을 맡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재판에서 배심원은 사실에 대한 판단을, 판사는 법률 해석을 담당합니다. 이번 소송을 놓고 보면 특허에 대한 침해가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의 손해를 입었는지 등에 대한 사실 판단은 배심원단이, 어떤 경우에 특허에 대한 침해가 있었다고 판단해야 하는지, 각각의 주장을 판단하기 위해 어떤 증거를 사용하고, 입증은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지 등등의 법률적 판단은 판사가 담당합니다. 판사는 최종적으로 심리가 끝난 다음에 배심원단이 사실 판단을 하는 데에 적용할 법적 기준 등을 지침으로 정리해 제시하게 됩니다. 이른바 Jury Instruction이라고 합니다. 이번엔 사건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 그 지침이 100페이지에 달했다고 하죠.
배심원단(이번에는 9명의 배심원으로 구성됐죠)은 이 지침에 따라 모든 사실적 쟁점들을 검토한 뒤 20쪽에 달하는 평결서 양식에 해당 내용을 기입하게 됩니다(평결서 자체가 인터넷에 올라 있습니다. 위의 사진 참조). 이를테면 삼성이 애플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주장을 애플이 설득력 있게 입증했느냐, (만약 삼성이 특허를 침해했다면) 삼성이 ‘고의로’ 특허를 침해했다는 점을 애플이 명백하게 입증했느냐, (역시 침해를 했다면) 삼성이 애플에 주어야 하는 배상액은 달러로 얼마나 되느냐 같은 식입니다. 배상액은 총액과 별도로 항목별 액수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배심원에 대한 지침만 100쪽에 달하고 평결서가 20쪽이나 되는 이렇게 복잡한 사안을 배심원들이 예상을 뒤엎고 신속하게 ‘처리’해버림으로써, 그것도 삼성의 주장을 아주 철저히 배제한 평결을 내림으로써 국내 언론에서는 이번 사건을 맡았던 배심원단의 평결 과정 전반에 대한 비판적 기사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특히 평결이 나온 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평결 과정의 문제 등등을 지적하는 기사가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부정확한 보도까지 나오고 또 그런 것이 기정사실화 되는 모습도 보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배심원들이 평결을 빨리 끝낸 이유가 주말에 요트를 타러 가기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이 ‘주말 요트설’의 진원지는 미국의 IT 관련 사이트인 CNET(https://news.cnet.com)입니다. Chris Matyszczyk라는 칼럼니스트는 “Apple-Samsung jury really wanted to go sailing this weekend”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애플-삼성 사건 배심원단은 이번 주말에 배를 타러 가고 싶어 했음에 틀림없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지요. 본문을 보면 더욱 명확합니다.
These 9 fine members of humanity must have peered through the window and thought: "Oh, look. We're in Northern California. It's sunny outside. A perfect weekend for sailing."
그런데 레토릭으로 가득 찬 이 글은 일부 국내 언론에서 ‘배심원단이 통째로 주말에 요트 타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는 식으로 소개가 됐고 블로그 등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배심원단이 통째로 주말에 요트를 타러 가려고 평결을 서두른 게 사실이라면 아마 평결 자체가 무효화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칼럼니스트가 배심원들이 평결을 서두른 걸 비꼬기 위해 동원한 수사학적 표현이었을 뿐인 거죠. 그리고 정확하게 CNET의 글을 인용한 국내 기사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블로그와 SNS에 퍼져나간 건 잘못된 기사였습니다.
그렇다고 평결 과정에 문제를 제기한 기사들이 모두 이런 식은 아닙니다. 모두 소송이 끝난 뒤에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애플과 삼성이 제기한 쟁점 자체에서 애플이 유리했다는 분석은 분명히 일리가 있습니다. 애플이 제기한 디자인이라고 하는 비교적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쟁점과 삼성전자가 제기한 통신기술 특허 침해라는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쟁점 가운데 배심원들이 손을 들어주기 편한 쪽이 어느 쪽일지는 자명한 것이니까요.
또 배심원들이 애플에 편향적이었다는 방증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배심원단의 대표였던 벨빈 호건의 인터뷰를 통해서입니다. 제가 찾아본 건 로이터와 한 인터뷰, 그리고 새너제이 지역 신문인 San Jose Mercury News와의 인터뷰입니다. 두 인터뷰에서 모두 호건은 특허 침해에 대한 강한 반감을 표출합니다. 특히 로이터 인터뷰에서는 삼성전자에게 단순히 가볍게 꾸짖는 수준이 아니라 충분히 고통스러운 정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말했습니다. 배심원단이 특허 침해에 고의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판사가 배상액을 3배까지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밝힙니다. 이번에 인정된 금액을 기준으로 3배 배상까지 간다면 애플이 애초에 요구한 27억 5천만 달러와 비슷한 금액이 되는 것이 우연일까 싶기도 합니다. 일부에서는 배심원단은 단순히 침해가 없었더라면 애플이 얻었을 이익을 기준으로 실제 피해만을 산정해야 한다는 지침을 어긴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Mercury News와의 인터뷰에는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국내 언론에도 오늘부터 일부 보도가 되고 있는데, 호건이 배심원들이 삼성의 특허 침해를 확신하게 된 근거를 밝힌 대목입니다. 증거로 채택된 삼성의 내부 이메일과 보고서들에 나오는 내용인데 아이폰과 이전의 삼성의 스마트폰 사이의 차이를 하늘과 땅 차이로 묘사하거나 아이폰을 베껴야 한다는 식의 말, 그리고 구글이 삼성 제품이 애플 것과 너무 비슷하다고 경고한 내용 등입니다. 배심원단의 평결 과정이 너무 빠르지 않았느냐는 일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론이 뒤집어질 가능성을 기대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삼성의 편법 증여 논란이나 노동 관련 문제 등을 들어 SNS 여론만 보면 국내에도 “삼성, 혼 좀 나야 돼”라는 반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닙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특히 애플의 특허를 베낀 것이 맞다면 그대로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평소 미운 구석이 있었다고 ‘뭐든지 삼성이 문제야’라는 건 이성적인 대응은 아니죠. 마찬가지로 사안을 좀 정밀하게 따져보지 않고 손쉽게 애국주의적 흐름에 맞춰 기사를 쓰는 것도 옳지 않죠. 특히 배심원단 관련 기사들은 조금 감정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렵겠지만 이런 사안일수록 흥분을 가라앉히고 취재를 좀 더 철저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잘못 인용된 기사를 그냥 베끼기까지 해서야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