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식모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수재였던 차수혁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월남 파병도 마치고 온 늠름하고 준수한 젊은이였다.
평소 자신을 눈여겨보던 국회의원에 발탁돼 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70-80년대 격동의 대한민국에서 권력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숱한 파고를 넘는다. 그 과정에서 단단하게 맷집도 다졌지만 동시에 지울 수 없는 때를 묻히기 시작한 그는 청와대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인간성은 파괴됐고 영혼은 상실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순간에도 사랑만큼은 얻지 못했다.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권력투쟁 속 마지막에는 손에 쥐었던 것들마저 다 잃게 된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 앞에서 결국 자신을 스스로 놓아버리고 말았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맘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9개월간 MBC '빛과 그림자'에서 차수혁으로 살았던 이필모(38)는 이렇게 말하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섭섭함은 없고 시원함만 있는 것 같은 얼굴인데, 그마저도 일단은 지난 여정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몸과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 필요해보였다.
지난 3일 '빛과 그림자'를 끝낸 그를 다음날 삼성동에서 만났다.
"어느 날부터 그냥 나 자신이 자연스레 차수혁이 되더군요. 그러더니 실제로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몸 안이 여기저기 너무 아파 내시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내 안에 종양이 자라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몸과 마음이 아팠어요."
그는 극 중 차수혁이 대립각을 이뤘던 장철환(전광렬 분), 강기태(안재욱)와 비교하며 "그들이 외향적인 인물인 것에 비해 차수혁은 철저하게 혼자 고뇌하고 삭히는 지식인이었다. 감정표현에 서툴고 분노를 발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화가 속에 쌓였고 결국 고름이 가득 차 터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차수혁은 마지막회에서 악연 중 악연인 장철환을 죽이고 스스로 권총자살을 선택했다.
이필모는 이에 대해 "지극히 차수혁다운 선택"이라며 "단지 강기태의 품에 안겨 죽는 게 아니라 자살을 해도 혼자 멀리 가서 죽었더라면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웃었다.
"사실 대본에는 자살하는 게 아니었어요. 장철환 경호원들이 쏜 총에 죽는 거였어요. 그런데 대본이 나오자 현장의 배우와 스태프가 모두 달려들어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모았고 작가와 머리를 맞대고 서로 토론하면서 장면을 수정했어요. 정말 엄청난 회의를 했습니다. 대본대로하면 배에 총을 맞는 거였는데 이마에 대고 총을 쏘는 것으로 바뀌면서 소품팀도 갑자기 바빠지는 등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찍은 장면입니다.(웃음)"
'차수혁이 불쌍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휴대폰을 꺼내 '카톡' 아이디를 보여줬다. '외롭다. 외롭고 또 외롭다'고 쓰여 있었다.
그는 "수혁이 생각만하면 애잔하고 쓸쓸하고 외롭다"며 "수혁이는 '빛과 그림자' 64회 동안 웃은 적이 서너 번이 안된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야망을 위해 달려간 차수혁이지만 사랑에서는 지고지순한 짝사랑의 순애보를 펼쳤다. 일부에서는 그의 사랑도 뒤틀린 욕망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딱 잘라 아니라고 말했다.
"집착이 아니라 사랑을 지키는 거였죠. 수혁은 정혜(남상미)에 대한 사랑에서만큼은 진실했어요.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가진 것 모두를 맞바꾸겠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꿨을 겁니다."
'빛과 그림자'가 월화극 1위를 지킬 수 있었던 데는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적 배경과 이야기가 큰 몫을 했다. 1960-80년대 격동의 시기를 배경으로 쇼비즈니스계의 이야기를 다루겠다고 출발한 드라마는 후반부에는 정치 드라마의 면모가 더 강했을 정도로 당시의 정치적 사건들을 많이 다뤘다.
"굵직한 현대사를 다룬 것에 대해서는 저는 높이 평가해요. 정인숙 사건 등 이번에 연기하면서 알게 된 일들이 많아 재미있었어요. 또 아날로그 시대의 감성을 연기하다 보니 빠르게 쓱 지나가는 게 아니라 뭔가 도장을 꾹 찍는 느낌, 흔적을 많이 남기는 느낌이 들었어요."
차수혁으로 사는 동안 그는 만학도로 대학에 편입해 학업을 병행하기도 했다. 서울예대 출신인 그는 올해 한양대 연영과 3학년에 편입했다.
"너무 좋아요. 촬영하면서 수업 듣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도 치르느라 바빴지만 오랜만에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니 참 좋네요. 제가 93학번이었는데 같이 다니는 친구 중 1993년생도 있어 세월을 실감했습니다.(웃음)"
'사랑을 믿어요' '솔약국집 아들들' '며느리 전성시대' 등을 통해 코믹하고 밝은 모습으로 다가왔던 이필모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이미지 변신을 했다.
"그동안 밝은 연기는 많이 했으니 이젠 지독한 것 좀 해보고 싶어요. 정말 센 연기 말이죠. 해가 갈수록 연기에 점점 더 진지하게 접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장난치고 싶지 않고 가벼운 터치로만 가고 싶지 않아요."
이필모는 "어떻게 하면 똑같은 연기도 내가 함으로써 보는 이를 '저리게' 만들까 고민하며 연기한다. 늘 그 고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