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뉴스

뉴스 > 사회

[취재파일] 일수꾼 드나드는 병원…알고 보니 정부 때문?

박세용 기자

입력 : 2012.01.10 08:29

정부가 치료비·조제비 안 주고 해마다 외상


2011년 12월 30일 저녁. 수도권의 한 요양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정부로부터 의료급여를 제때 받지 못해 살림살이가 쪼들린다는 병원이었습니다. 사채도 썼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뭔가 어수선했습니다. 인터뷰하기로 했던 원장은 취재팀을 한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당황하고 허둥지둥 대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문 밖에선 갑자기 누군가 악악거렸습니다. 누가 왜 그러는 거예요? "아니, 사채업자들이 병원까지 찾아와가지고."

제가 입을 떼기도 전, 영상취재기자는 카메라를 들고 슥 나갔습니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병원 찾아온 사채업자? 무조건 찍어야지요. 저와 원장, 둘이서 10초 정도 앉아 있었을까요. 저도 양해를 구하고, 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채업자 인터뷰해야죠. 머리를 각 지게 깎은, 이른바 깍두기 아저씨는, 병원 직원과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깍두기 형님은 아마도, 병원이 일부러 방송사 취재진을 부른 것 아니냐, 장난을 친 것 아니냐고, 항의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채업자와 병원 직원간의 대화. 거리가 멀어 들리지 않았습니다. 무선 마이크를 던질 수도 없고.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립니다. 윽박지르는 현장음을 따면 좋은데, 머릿속엔 그 생각뿐입니다. 가슴이 쿵쿵쿵쿵. 저도 사람인데, 깍두기 형님이 무섭지 않겠습니까. 표정 폭력만으로 묵은 이자를 받아내는 내공을 무시 못 합니다. 그래도 날 죽이기야 하겠어, 라는 생각으로, 날 폭행하면 카메라에 다 찍힐 거고, 그거 방송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으로, 무선 마이크를 꽉 움켜쥡니다.

둘 사이의 대화가 끝났습니다. 마이크 성능 하나만 믿고, 마이크를 들이대는 듯, 마는 듯. 말을 걸어봅니다. 형님, 여기 왜 오셨어요? “아니 당신이면 안 그러겄소. 의사 XX가 싸가지가 없어가지고.” 얼마를 안 갚은 거예요? "아니, 돈 받으러 온 게 아니라, 누구 못 만난 사람이 있어가지고." 만나긴, 누굴 만나요, 남자끼리 까놓고 얘기해야지. 깍두기 형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집니다. 한번 쳤으니까, 빠져야 합니다. 싸가지 운운 현장음이 들어갔을 테니, 일단 제작 측면에서 안심입니다. 쓸 만한 오디오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기자 양반, 인터뷰 오래 걸리요잉?" 좀 걸릴 것 같은데요. 원장님이랑 할 얘기 있으면, 먼저 하세요. 카메라가 있을 때, 뭔가 그림을 더 만들어야 하므로, 먼저 대화하라고, 순한 양처럼 권유합니다. 인터뷰 오래 걸리는 것처럼. 사채 형님은 알았다고 하십니다. 병원장과 사채업자의 대화를 녹취할 수 있는 찬스를 만든 것입니다. 취재진을 기다리던 병원장 방에 얼른 들어가, 먼저 대화하시라고 하면서, 슬쩍 무선 마이크를 놓고 나옵니다. 이 무선 마이크는 성능이 아주 좋아, 방안 대화를 다 녹음할 수 있습니다. 은밀히 윽박지르는 현장음만 녹취하면, 이젠 게임 끝인데, 이런, 깍두기 형님은 원장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갑니다. =.=

병원에서 사채업자를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나중에 병원 측으로부터 받은 CCTV를 확인해 보니, 취재진과 사채업자는 5분 차이로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마치 하늘이 맺어준 인연처럼. 병원이 사채에 손을 대는 것도 흔치 않고, 날마다 이자를 받으러 다니는 일수꾼은 말이 일수꾼이지, 병원을 찾아오는 것도 흔치 않습니다. 흔치 않은 일의 연속=행운이며, 깍두기 형님 입장에서는 황당한 불행입니다. 방송에 나간 사채업자는, 안타깝게도 현재 경찰로부터 유명세를 치르고 있습니다.



병원이 쓴 사채는 2곳에서 5천만 원. 선이자가 780만 원입니다. 연체된 직원 월급은 2천7백만 원. 중환자실에서 일하던 간호사 6명과 중국인 간병인은 그만뒀습니다. 의사는 임금 체불로 검찰에 고소돼 검찰 조사도 받았습니다. 병원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교도소 담벼락을 걷는 기분이라고, 병원 의사는 말했습니다. 정부에서 못 받은 의료급여는 5천7백만 원. 지난해 10월과 11월, 두 달 치를 못 받았고, 12월 의료급여까지 따지면 연체 액수는 더 많을 것입니다. 병원 살림살이가 어렵다고 사채에 손을 대는 건 문제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5천7백만 원을 받았으면, 사채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약국도 정부에서 받을 돈 못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경기도의 한 약국은 지난 12월 못 받은 돈이 1천5백만 원. 현금 흐름이 안 돼, 할 수 없이 카드대출 1천5백만 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한테 처음으로, 이게 말이 되느냐면서 게거품을 물었던 친구 또한, 약사인 아버지께 드리기 위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고, 5백만 원을 대출받았습니다.

이자는? 다 개인 부담입니다. 사채 일수라는, 최악의 경우도 있지만, 일수가 아니더라도, 꼬박꼬박 제 주머니를 털어 금융기관에 이자를 내야 합니다. 월말이면 제약업체에 현금 결제를 해줘야 하는데, 정부가 줄 돈을 안 주니, 제 아무리 의사 약사라도 손을 벌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해 말 이런 식으로 밀린 돈이 전국에서 6,500억 원입니다. 재작년 말에도 3천억 원 넘게 밀렸습니다. 한 번 홍역을 치렀더니, 보건복지부도 면역력이 생긴 걸까요. 전화했더니, 의료급여 지연 문제는 큰 현안이 아니라고 대답하더군요. 복지부 출입도 아닌 박 기자님이 뭘 모르고 전화했다는 식입니다. 현실 인식도, 해결 의지도 없어 보였습니다.

복지부 대답의 행간에는, 의료급여 예산이 부족한데,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냐는 뉘앙스가 느껴졌습니다. 채권자인 의사와 약사는, 정부에게 을일 수밖에 없는데, 채권자가 악악거리지 않으니, 정작 채무자는 우리한테 어쩌라는 거냐고 팔짱 끼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채권자가 언론에 제보해 신원이 드러날 경우, 건강보험공단 등을 통해 보복 조사가 들어간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2011년 의료급여 예산은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4조 7천억 원. 정부는 이 돈을 12분의 1로 쪼갠 다음에, 건강보험공단을 통해 매달 병원과 약국에 지급합니다. 시도 별로 책정되는 금액은 모두 다릅니다. 노령 인구도 많아지고, 의료급여 수급 대상도 확대돼, 매달 그 12분의 1 금액만으로는 부족하지요.

그래서 다음 달 예산을 당겨쓰고, 정작 다음 달이 되면, 또 다음 달 예산을 당겨쓰고, 결국 연말이 다가오면 1년 예산이 바닥나고, 이제 내년 예산을 당겨쓰고, 다람쥐 쳇바퀴의 악순환입니다. 작년에는 인천과 부산의 의료급여 예산이 10월부터 동 났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외상 진료에 돌입했습니다. 재단이 튼튼한 대형병원은 의료급여 좀 못 받아도 문제없지만, 의료급여 대상인 저소득층 환자를 많이 받는 중소병원이나 노인 중심의 요양병원은 경영난에 직면합니다. 보건소 앞 대형 약국도 위태위태합니다.

2012년 올해 의료급여 예산은 총 5조 2,333억 원입니다. 보건복지부는 예산이 8.4% 늘어났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전국 의료업계에 외상값으로 달아놓은 6,500억 원을 갚고 나면, 별로 늘어난 예산도 아닙니다. 의료급여 수요는 매년 4~5% 늘어나는데, 예산은 못 쫓아갑니다.

1월 15일쯤이면 의료업계가 외상값을 갚는다고 합니다. 의사협회는 '을'로서 감히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고, 속병만 앓고 있습니다. 올해 말에도 외상 진료를 하지 않을까, 또 외상 조제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슬픈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다고,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 박사님은 명쾌하게도, 올해도 외상 사태가 벌어질 거라고 단언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언제까지, 의료급여는 전체 수요의 3%에 불과하다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무작정 뭉개고 있을 것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