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표와 쇄신파 의원들이 만나기 전까지 한나라당을 들끓게 했던 화두가 있다. 바로 '재창당'이다. 단어만 놓고 보자면 '다시 창당한다'는 뜻이다.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그동안 한나라당에서는 쇄신, 재창당, 비상대책위원회 이런 단어들이 복잡하게 뒤얽히면서 시민들 입장에선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설전이 1주일 간 벌어졌다. '재창당을 하자', '당 해산 후 재창당을 하자', '신당 수준의 재창당을 하자',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을 하자' 등등... 이 '재창당'이란 단어 뒤에 숨은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가?
◈ 재창당은 '과거와의 단절'
한나라당에서 재창당이란 용어가 정확히 언제 등장했는지 알 수 없지만 10.26 서울시장 선거 패배와 디도스 사태 이후 당 지지율이 급락하자 이대로는 내년 총선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의원들의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나온 말이다. 한마디로 현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원들이 짜낸 방책 중 하나다.

재창당을 가장 강력히 요구한 것은 쇄신파들로 대부분 친이계 수도권 의원들이었다. 친이계가 많은 건 지난 18대 총선 때 MB바람을 타고 수도권에 대거 포진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MB정권 1년을 남겨둔 지금, 금배지를 안겨준 MB 정부의 후광은 이제는 내년 총선의 발목을 잡는 그림자가 됐다.
재창당은 바로 이 MB 정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현 정부 인기 하락의 원인이 된 정책과 실책, 그에 따른 책임으로 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물론 통렬한 반성을 전제로 한다. 반성하는 대신 현 정부와는 전혀 다른 당으로 거듭 태어나겠다는 취지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한나라당 간판'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총선에서 이길 수 없으니 당 간판을 바꾸자는 것이다.
어디선가 많이 보던 광경이다. 4년 전 '열린우리당'이 꼭 그랬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이대로는 공멸한다며 탈당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기득권을 버리겠다는 외침과 함께 결국 시민사회세력을 아우른 '대통합민주신당'이 생겨났고 100년 정당을 외쳤던 열린우리당은 해산됐다.
당명은 물론 당 정체성과 정책, 인적 구성까지 새롭게 바꾼 것이다. 한나라당에서 최근 터져나온 '재창당'의 실행 모델이라고 봐도 좋겠다. 특히 두 당 모두 집권 여당으로, 정권 말 추락한 지지도로 고민하는 모습까지 닮아 있다.
한나라당에서 재창당을 외친 사람들은 잘못된 비유라고 반박한다.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은 기득권 포기와 뼈 깎는 반성을 외쳤지만 2007년 대선은 물론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도 참패했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권이 그랬다. 실패한 모델과 비교하는 걸 좋아할 리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 의원들이 외치는 재창당과 당시 열린우리당의 재창딩이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면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한다. (적어도 내가 물어본 의원들은 그랬다) 그런데도 그들이 재창당을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 재창당은 살기 위한 '몸부림'
현재 수도권에서 '한나라당'이란 이름으로 이길 수 있는 곳은 강남 3구와 용산 지역 정도를 빼면 전무하다는 게 여의도 정가의 분석이다. 유권자들이 '한나라당'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손사래를 치기 때문이다. 대의 정치의 단점 중 하나는 유권자들이 후보의 자질보다 당을 보고 뽑는 점이다. "의원 개인의 역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지지율은 15%~20%까지다. 때문에 적어도 당 지지도가 30%는 나와줘야 싸워볼 수 있다." 어느 의원 보좌관의 말이다.

재창당은 그대로 앉아서 죽느니, 되든 안 되든 한 번 시도라도 해보자는 처절한 몸부림인 셈이다. 상대적으로 여당 강세지역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은 공천권을 갖는 세력에게 찍히지만 않고 넘어갈 수 있다면 은근슬쩍 묻어 가도 그만이지만 수도권 의원들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재창당을 놓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계파색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재창당 뒤에 숨은 '공천권' 방정식
재창당의 표면적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정도면 될 듯하다. 하지만 이게 다일까? 또 다른 역학관계가 숨어 있다. 바로 공천권이다.
재창당을 말하면서 공천권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이 죽게 생겼으니 기득권을 포기하고 당 살리기에 나서야 한다는데 거기다 대고 대표적 기득권인 공천권을 운운할 바보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게 또한 공천권이다. 의원들에게 공천권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당 쇄신이 필요한 건 당선을 위한 것이고 당선을 위해선 공천이 전제돼야 한다.
한나라당 재창당 논란 때로 되돌아 가보자. 재창당은 필연적으로 전당대회를 수반한다. 전당대회는 지도부 선출을 전제로 한다. 지도부 선출은 곧 권력의 분점을 의미한다. 물론 단일 지도체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일부나마 권력 분산은 필연적이다.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라고 해서 권력에 견제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상대책위원회는 비대위원장이 전권을 갖고 꾸린다. 계파나 지분에 따라 사람을 심을 수 없는 구조다. 비대위 체제가 당 쇄신에 더 적합할진 몰라도 계파별 지분 확보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여기에는 당시 재창당을 반대한 친박 측과 쇄신파 등 다른 쪽의 신뢰 문제가 깔려 있다. 믿고 맡겨달라는 친박과 믿음이 가지 않으니 재창당이란 절차를 통해 안전판을 두고 싶은 타 세력들의 신경전이다.

친박 측 입장에선 계파간 분란이 뻔히 예상되는 전당대회를 여는 것을 수용할 수 없다. 비상 상황에서 계파가 난립하면 당 쇄신은 어려워 질 수밖에 없다. 또 굳이 전당대회를 열 것이라면 박근혜 전 대표에게 비대위를 맡아달라고 할 필요도 없다. 박 전 대표 없이 전당대회 준비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려우니 살려달라고 하면서 이런 저런 조건을 다는 것 자체가 불공정한 요구일 수 있다.
하지만 쇄신파 등 타 세력의 입장은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재창당을 하고 새 지도부가 구성돼야 소위 공천권 독점을 막을 수 있다. 실제로 박 전 대표가 비대위원장에 취임해 공천권을 독점할지는 차후 문제다.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의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실 재창당 논란 당시, 박근혜 전 대표가 공천권을 독점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세력의 개입을 우려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과거 18대 때 친이계의 공천이 좋지 않은 선례가 됐다. 한마디로 박근혜는 믿어도 친박은 못믿겠다... 뭐 이런 생각인 셈이다.
◈ 팔색조 '재창당'
당 쇄신 논란 속에서 재창당의 의미는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초기 재창당은 완전히 새로운 신당 창당을 의미했다. 과거 한나라당이나 청와대와 완전히 결별할 수 있는 수준의 신당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당대회' 개최를 통한 쇄신으로 변했고 이후 '당명 개정' 여부에 초점이 맞춰졌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뭐하지만 '당 쇄신'이라는 당위론 속에서 재창당의 해석이 변화를 거듭한 것이다. 앞서 말한 공천권 부분은 당명 개정 쪽으로 흐름이 바뀌면서 사실상 사라졌다. 앞서 말했듯 쇄신 논란이 국민 앞에 공천권 같은 기득권 다툼으로 비칠 경우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계파 간 불신의 문제는 쇄신파와 박근혜 전 대표의 회동으로 봉합 국면을 맞았다. 측근들을 통한 간접 소통으로 쌓인 불신의 문제도 직접 만남을 통해 일정 부분 해결을 봤다. 의총 참석도 그런 문제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됐다. 쇄신파가 요구한 '신당 수준의 재창당'과 박근혜 전 대표가 내놓은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은 그런 선에서 타협을 봤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재창당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아직도 재창당을 둘러싼 논란은 진행 중이다. 주로 박근혜 전 대표를 제외한 대선 예비후보 진영 사람들이 그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독주를 우려한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물론 당 쇄신에 대한 진정성을 배제할 순 없겠다.
'재창당'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뜻이 앞서 설명한 것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의미를 기자가 너무 확대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또 냉정하게 평가할 때 앞서 말한 것들이 맞는 것일 수도, 다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정치적 현상을 누구도 명확히 정의를 내릴 순 없다.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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