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전으로 불을 끄는 모의 훈련이라도 한번 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난해 눈앞에서 불이 춤을 췄던 게 아직 생생한데…."
마을 대표 박진규씨는 아직 곳곳에 남아있는 화마(火魔)의 흔적을 둘러보다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고급 레스토랑과 고층 주상복합 건물들이 솟아있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골목 사이로 5분만 걸어 들어가면 나타나는 이곳은 지난해 11월 화재로 무허가 판잣집 50여곳 중 21채가 불에 타면서 수십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던 산청마을.
1년여가 지난 아직도 그을린 건물 잔해 속에서 사는 주민들은 여전히 화재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
마을 초입에 놓인 소방로는 큰 소방차가 들어오기에는 턱없이 좁아 보였다.
"그나마 이 길에 차가 한 대라도 주차돼 있으면 작은 소방차도 못들어온다"는 박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을에 들어서자 비닐과 목재, 스티로폼, '떡솜'이라 불리는 단열재 등 불에 잘 타는 '특수가연물질'을 재료로 지어진 판잣집들이 서로 다닥다닥 늘어서 있었다.
박씨에 따르면 남은 80여명의 주민 중 70∼80%가 불이 나면 대피가 힘든 장애인·노약자이지만, 이곳 무허가 판자촌에는 일반 주택가와 달리 스프링클러나 화재경보기가 제대로 설치된 곳이 없다.
지붕마다 송전선에서 불법으로 전기를 끌어다 쓰는 이른바 '도전'용 전선이 얼기설기 늘어져 있는데, 퓨즈가 제대로 설치된 곳이 없어 한번 과부하라도 걸려 불꽃이 튀면 마을 전체가 위험해질 것처럼 보였다.
소득의 10% 이상을 난방비에 쓰는 '에너지 빈곤층'인 이곳 주민들은 도시가스가 연결 안 된 탓에 누전 위험이 큰 전열기를 사용하거나, LPG 연료통을 안전대책 없이 아무렇게나 집밖에 연결해둔 채 난로를 떼고 있었다.
이곳 주민 한모(55)씨는 "우리 동네 자체가 화재 원인이다. 어쩔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바람을 막으려고 집집마다 천장에 비닐과 모포를 덮어뒀는데, 지난해 불이 났을 당시 여기에 불꽃이 옮겨붙으면서 순식간에 화재가 확산됐다고 했다.
전기담요 위에서 몸을 녹이던 최모(74) 할머니는 화재 이후 지급받은 휴대용 화재경보기를 내밀며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 제대로 설명도 안해주니 믿을 수가 없다"며 "또 불이 나도 똑같이 당할 것 같다. 달라진게 별로 없다"고 불평했다.
일반 주택가였다면 별것 아니었을 사고가 참사로 이어지자 지자체와 소방당국은 화재 예방교육과 도전선 정리, 휴대용 화재경보기 지급 등 예방책을 내놨다.
하지만 올해 6월에도 포이동 재건마을에서도 불이 나 동네 3분의 2가 전소, 100명 넘는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빈민층 거주지역의 화재위험은 상존하고 있다.
문제는 산청마을이나 재건마을 같은 무허가 주택가는 법적으로 주거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소방로를 정비하고 방화구역 같은 시설을 설치·관리하는 등의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서울시와 자치구는 기본적으로 주거지역 정비를 위해 이곳 마을을 철거하겠다는 입장이어서 화재예방을 위한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대응이 나오기 힘들다.
소방 관계자는 "소화전도 설치하고 예방책을 마련하고 있다"면서도 "대응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시에 예산을 요청할 명분이 많지 않다"고 털어놨다.
이에대해 전문가들은 '안전이 우선'이라며 판자촌 화재예방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재성 한국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미니소방서, 소화전, 소화기 등을 설치해도 판자촌 주민 대부분이 노약자이기 때문에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며 "건축 측면에서 근본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세용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는 "판자촌은 불법 건물인 한편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 최소한 주거의 질을 갖추도록 각 지자체가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 교수는 "정부가 대형 평수 위주로 재개발·재건축 정책을 펴면서 저소득층이 갈 곳이 없게 된 만큼 정부의 책임이 크다"며 "단속 대신 지원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