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뉴스

뉴스 > 사회

[취재파일] 조폭 해방구된 심야 장례식장

조성현 기자

입력 : 2011.10.25 17:49|수정 : 2011.10.25 18:19

조폭 난투극 현장 취재기

동영상

■ 공포의 금요일 밤

경찰의 날이던 지난 금요일(21일) 밤 11시40분쯤 익명의 제보 전화가 보도국에 걸려왔습니다. 

"인천 길병원 장례식장에서 조폭들끼리 난투극이 벌어졌다."

심상치 않은 전화였습니다. 바로 길병원 장례식장에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부탁했지만 직원이 말을 얼버무렸습니다. 뭔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회사 차를 타고 곧바로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서울 목동과 인천 길병원은 그리 멀지 않아 밤 12시 반쯤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엔 날씨가 쌀쌀해 SBS 로고가 박힌 파란색 점퍼를 입고 현장에 접근했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장례식장 보안 요원이 다짜고짜 막아섭니다. 홍보팀 허락 없이는 어떤 취재도 안 된다고 합니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홍보팀에 연락하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보안요원과 실랑이할 시간이 아까워 적당히 얘기해서 따돌렸습니다. 그리고 취재 편의를 위해 회사 점퍼를 벗었습니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욕설이 난무하더니 장례식장 안에서 건장한, 한 눈에 봐도 조폭 분위기가 나는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졌습니다. 충돌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에 휴대폰부터 꺼내들었습니다. 여차하면 '그림'을 찍을 채비를 한 겁니다.

그 때 두 남성이 갑자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활극이 따로 없었습니다. 발길질과 주먹질이 오가더니 다른 건장한 청년들이 합세해 싸움은 더 커졌습니다.

점퍼를 한 손에 둘둘 말고 그 사이에 얼른 휴대폰을 끼워넣었습니다. 촬영하고 있다는 걸 조직원에게 들켰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습니다. 방송용으로 쓰려면 휴대폰을 가로로 들고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찍어야했지만 그 상황에선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전화기를 세로로 들고 싸움이 벌어지는 쪽으로 방향을 맞췄습니다. (나중에 제가 찍은 영상을 확인하니 땅바닥이 3분의 1, 점퍼에 가린 장면이 3분의 1, 그나마 제대로 찍힌 그림이 3분의 1 정도였습니다.)

현장에는 제가 도착했을 때 형사기동대 차량 1대가 있었습니다. 그 옆에 한 남성이 쓰러져 있었고, 바로 옆에 다른 남성이 칼을 들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쓰러진 사람은 조폭이었고, 칼을 들고 있던 사람은 남동서 형사였습니다. 흉기를 휘둘렀던 다른 조직원은 이미 검거돼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활극은 제가 도착한 뒤로도 20여 분 정도 계속되다가 새벽 0시 50분쯤 순찰차 10대 정도가 현장에 속속 도착하면서 잦아들었습니다. 방범순찰대 요원들과 112 타격대 등 제법 많은 경찰이 배치되고, 그제서야 조폭들은 떼를 지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시간 반 치안공백

장례식장에서 조폭들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있다는 첫 신고가 접수된 것은 21일 밤 10시 18분이었습니다. 곧이어 지구대 순찰차 1대가 도착했지만 충돌이 없어 계도 조치만 하고 10시 25분 철수했습니다. 그 뒤로도 신고는 10시46분, 10시51분 계속됐습니다. 10시54분 이번엔 순찰차 2대가 도착했지만 역시 별다른 조치 없이 철수했습니다. 장례식장 조문객들로 온 데다 역시 이렇다할 소란이 없다는 말만 듣고 빠진 겁니다.

하지만 조폭들 사이의 시비가 격해졌고 강력3팀 형사 5명이 23시37분에 도착했습니다. 이들 형사는 조폭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을 뿐 폭력 등 형사처벌을 할 만한 행위가 눈에 띄지 않아 현장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폭들의 난투극과 칼부림이 이어졌지만, 강력팀 형사 5명이 이들을 제압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형사과장은 0시 50분, 서장은 상황이 모두 정리된 새벽 1시에 도착했습니다.

대규모 경력이 도착한 뒤 경찰은 칼부림 현장을 중심으로 길을 막고 폴리스라인을 쳤습니다. 이 때 한 폭력조직원이 경찰과 말싸움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반말로 욕을 하며 경찰을 몰아세웠지만 경찰은 이렇다할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 징계 보다 시스템 정비를..

취재진이 처음 도착했을 때 수십 명의 조폭들이 장례식장 주변에서 활개를 치던 상황이었습니다. 형사 5명으로는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형국이었습니다. 게다가 눈 앞에서 벌어진 칼부림 피의자를 잡아야했고, 피해자를 응급실로 옮겨야하는 상황이어서 형사들은 주변 상황을 통제할 여유가 없던 게 사실입니다.

만약 첫 신고 때 경찰력을 대거 투입해 경비라도 세웠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대대적인 감찰과 중징계를 예고했습니다. 인천청장과 경찰청 수사국장은 상황을 축소보고한 잘못으로 징계를 받게 됐고, 인천 남동서장은 직위해제됐습니다. 현장 조치가 미흡했던 형사과장, 강력팀장, 순찰팀장 등이 줄줄이 징계를 받게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경찰이 제 때 대응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징계로 거둘 수 있는 효과도 적지 않을 겁니다.

이제 와서 조금 더 일찍 조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장에 나온 형사들이 너무 많이 다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제 형뻘 또는 또래 강력팀 형사들이지만 현장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조치하던 모습을 본 저로서는 어쩌면 그들이 운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경찰관 개개인에 대한 처벌에서 마무리되지 말고 조폭 관련 신고에 대한 대응 시스템을 손보는 쪽으로 가야합니다. 다시 조폭들과 맞서고 싸워야할 사람은 결국 현장의 형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새벽 2시쯤 상황이 마무리된 뒤, 편의점에서 박카스 2박스를 사서 현장에 놓고 왔습니다. 고생하는 모습에 그냥 오기 안쓰러워서  그랬는데, 누구도 와서 꺼내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도 한 켠에 박카스 상자를 내려놓고만 왔습니다. 이번 사건이 경찰 조직 전체에 전화위복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SB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