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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수도에 '분노한 사람들' 물결 가득

입력 : 2011.10.16 05:18

브뤼셀 시위대, 자본의 탐욕과 불평등한 현실 규탄


자본의 탐욕과 사회적 불평등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16일 유럽연합(EU) 수도 벨기에 브뤼셀에서 '진짜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유럽 각국 뿐만 아니라 미국과 아시아에서도 온 6천여 명의 시위대는 이날 점심시간 무렵부터 브뤼셀 북부역 광장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광장은 이내 각종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피켓의 숲을 이뤘다.

"거리를 점령하라", "긴축재정 반대", "우리는 정치인과 은행가의 상품이 아니다", "우리가 99%다", "진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 "민중들이 일어나고 있다", "세상을 바꾸자"...

각국에서 온 시위대의 구호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언어만큼이나 옷차림도 각양각색이었다. 어릿광대나 유령 분장을 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이었으나 자녀와 함께 나온 중년 부부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도 적지 않았다.

"1%는 도둑, 99%는 위기"라고 적힌 종이를 모자 위에 매달고 있던 네덜란드 대학생 얀은 "유럽의 금융ㆍ재정 위기는 금융가 등 1%의 특권층 때문에 빚어졌고, 그들 때문에 99%인 우리가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자녀, 부인과 함께 온 헤이르트 씨는 "아이들을 위해 시위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소수의 금융자본과 힘있는 자들에 휘둘리는 지금과 같은 체제가 계속되면 우리 아이들 세대는 숨 막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광장에서 함성을 지르던 이들은 오후 2시30분(현지시간) 행진을 시작했다. 기타와 북소리에 맞춰 구호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하며 마치 축제를 즐기는 분위기였다.

행진 도중 은행이 보이면 어김없이 야유를 퍼붓고 경적을 불어 댔다. 일부 젊은이가 은행 창문에 페인트로 구호를 적고, 현금 지급기에 "멈춰라"고 적힌 스티커를 불이기도 했다. "이 겨울에 계속 따뜻하게 지내다니 은행에 불을 질러라"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오늘 아침 스페인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엔지니어 곤살레스 씨는 이를 지켜보다 "표현이 심하긴 하지만 그만큼 일반 시민의 아픔과 분노가 크다는 표시"라고 설명했다. 그는 "소수 대자본과 은행의 탐욕 때문에 빚어진 위기를 우리의 세금으로 구해줬고, 그들은 여전히 문제없이 사는데 우리는 고통받고 있다. 스페인 청년의 40% 이상이 실업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융시장에 대한 이들의 분노는 첫 번째 집결지인 브뤼셀 증권거래소에서 다시 표출됐다.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하고 화려한 거래소 건물을 향해 수백명이 미리 준비했던 낡은 신발을 던지는 이벤트를 벌이자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거리 행진을 계속하던 시위대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등 EU 관련 기관들이 밀집한 슈만 로터리로 향했다. 금융·재정위기를 초래한 책임은 27개 회원국 정부 뿐만 아니라 브뤼셀의 EU 관리들에도 있는데 서민들을 쥐어짜는 긴축재정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경찰은 그러나 EU 집행위 본부 건물 쪽으로는 진입을 하지 못하도록 시위대를 우회하게 했다. 시위대는 결국 EU 건물들이 바라보이는 생캉트네흐 공원에 집결해 EU의 관료주의와 부패를 규탄하는 구호들을 외쳤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운영진은 공식 시위를 끝냈다.

시위대가 삼삼오오 흩어지는 가운데 눈물을 글썽인 채 북을 두드리던 쥐세페 씨는 "지난 1주일 동안 함께 모여 우리들의 문제를 토론한 것 자체가 엄청난 힘이다. 우리의 목소리는 정부와 부자들에게 들리지 않았으나 이젠 99%가 뭉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대학생인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스페인 '분노한 사람들'의 행진에 합류해 브뤼셀까지 걸어왔다.

전 세계 동시 시위는 이날 끝났으나 스페인에서 1천700여km를 걸어온 '원조 분노한 사람들'을 비롯해 일부는 브뤼셀에 계속 남을 예정이다. 오는 23일 브뤼셀에서 열릴 EU 정상회의 때 다시 시위를 벌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 밤 당장 노숙을 해야만 한다. 그동안 시위대 운영본부 겸 400여 명의 숙식 장소로 쓰이던 쾨켈베르크 구(區)의 `브뤼셀 호게스쿨 대학(HUB 응용과학대) 건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비어 있던 이 건물을 내줬던 쾨켈베르크 구청은 이들이 시위를 나간 사이에 건물을 폐쇄했다. 구청 측은 "화장실에서 물이 새나와 지하실이 일부 잠겼고, 이로 인해 누전과 감전이 우려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당장 갈 곳이 없는 시위대는 생캉트네흐 공원 등 브뤼셀 시내 여기저기서 텐트를 치거나 침낭만으로 노숙을 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온 대학생 페터라고만 밝힌 청년은 "먼 곳에서 온 시위대 중 상당수는 원래부터 공원에서 캠핑하며 매일 토론회와 집회를 열 계획이었다. 생각보다 브뤼셀 밤 날씨가 춥지만 아무 문제 없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브뤼셀=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