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이 세상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국가 기관의 권능을 부여받아 죄를 입증할 증거를 수집하는 경찰과 검찰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결백을 항변하는 피고인도, 양 쪽의 주장과 증거를 검토하고 판정을 내리는 사법부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논리적이고 명백한 진실을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새벽녘, 아무런 목격자도 없는 곳, 한 가정의 욕실이라는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면 단호히 진실을 확정짓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지난 1월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발생한 28살 만삭 부인 박 모 씨 사망 사건. 경찰은 수사에 착수한지 2주 만에 유명 종합병원 레지던트였던 남편 31살 백 모 씨를 체포합니다. 유력한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수사기관의 첫 번째 증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감정서에 명시된 '사망 원인'이었습니다. 국과수는 감정서에 사망원인을 "손에 의한 목 눌림 질식사"로 명시했습니다.
만삭 상태인 여인이 자신의 집 욕실에서 손으로 목이 졸려 질식해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이 사실이 인정된다면 다음으로 중요한 근거는 사망 시각입니다. 만약 피해자 여성이 숨진 것이 남편과 함께 있던 새벽 6시 41분 이전이라면(남편이 집에서 나온 시각이 새벽 6시 41분경이라는 것은 오피스텔 복도의 CCTV 등으로 입증 가능합니다) 아내의 목을 조를 수 있는 사람은 남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망 시각이 새벽 6시 41분 이후라면 - 비록 오피스텔 CCTV나 경찰의 현장 조사 결과 제 3자가 침입한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지만 - 남편이 아닌 누군가가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한 것이 되겠지요.
피해 여성의 사망원인과 사망시각. 결국 이 두 가지가 재판의 핵심 쟁점이 됐습니다. 용의자로 지목된 남편은 의사입니다. 남편은 재판과정에서 의학적 근거를 들이대며 수사기관이 주장하는 두 가지 핵심 증거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외국의 유명 법의학자를 불러 사망원인이 '손에 의한 목 눌림'이 아니라, '이상 자세에 의한 질식사'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남편 측이 주장하는 '이상 자세에 의한 질식사'는, 만삭인 부인이 실신하면서 욕조 속에 목이 접힌 상태로 쓰러졌고, 정신을 잃은 상태여서 자세를 바로 잡지 못해 결국 목에 피가 통하지 않아 질식해 숨졌다는 논리입니다.)

수사기관이 주장하는 사망시각('새벽 6:41 이전 사망')을 논파하기 위해 남편 측은 검안의의 추정 사망시각이 정확하지 않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더 정확한 방법인 직장온도 측정에 근거한 사망 시각 추정 방법을 사용하면 남편이 집을 떠난 새벽 6시 41분 이후로 사망 시각이 추정된다는 것이지요. (직장온도 측정법이 더 정확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재판부도 동의했습니다)
6개월 동안 법정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몇 차례 공판에서 지켜본 남편 백 모 씨는 아내를 잃은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침착한 자세로, 의학적 지식을 근거로 주장을 개진했습니다.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한 국과수 소속 법의학자들과 논쟁하기도 했습니다. 범죄의 유무를 따지는 법정이 아니라, 법의학 세미나에 온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재판부는 결국 남편 백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백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습니다. 사망 원인과 사망 시각에 대한 남편 백 씨의 주장이 타당성이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판결을 내리며 재판부 역시 '사망원인'과 '사망시각'에 대한 남편 측 주장을 논파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 재판부는 국과수의 증언과 법의학적 지식을 토대로 남편 백 씨의 주장을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법의학적으로 볼 때 '손에 의한 목 눌림 질식사'(액사)가 맞다는 겁니다.
그러나 백 씨에 대한 공소사실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인 '사망 시각'에 대해 재판부는 사망 시각에 대한 논리를 전개할 때처럼 단호하지 못했습니다. 재판부 스스로도 "피해자의 사망시각이 당일 06:41경 이전이라는 것(피해자를 액사에 이르게 한 사람이 피고인이라는 것)에 부합하는 직접 증거는 없긴 하나"라고 판결문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백 씨가 아내를 죽였다는 논리를 완성하기 위해 필수적인 '사망시각'을 확정지을 만한 직접 증거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간접 증거와 정황에 의해 사망 시각이 새벽 6:41 이전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고 주장합니다. 피해자의 평소 출근 습관, 남편 백 씨의 평소 출근 습관, 남편 백 씨의 이마 등에 난 상처, 남편 백 씨의 진술 신빙성, 남편 백 씨가 아내가 사망한 후 보인 이상한 행적(전화를 고의적으로 받지 않는다거나, 도서관에 평소보다 일찍 간다거나, 장모에게 갑자기 전화를 한다는 등) 등이 재판부가 인정한 간접 증거였습니다. 이 간접증거를 종합해 볼 때 사망 시각이 6시 41분 전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습니다.
재판부의 판단은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과 증거만 놓고 볼 때 상식에 부합하는 결정으로 보입니다. 다만 '상식에 부합하는 간접 증거'로 진실을 확정짓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요? 그것도 31살 먹은 청년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하는 것이라면요.
재판부 역시 그 판결문중 2페이지 가까이를 할애하고 따로 장을 구분해 "간접사실에 의하여 피해자의 사망시각을 06:41 이전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고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재판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인지라, 길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형사재판에 있어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하고, 이러한 정도의 심증을 형성하는 증거가 없다면 피고인이 유죄라는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으나, 그와 같은 심증이 반드시 직접증거에 의하여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경험칙과 논리법칙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한 간접증거에 의하여 형성되어도 되는 것이며, 간접증거가 개별적으로 범죄사실에 대한 완전한 증명력을 가지지 못하더라도 전체 증거를 상호관련하에 종합적으로 고찰할 경우 그 단독으로는 가지지 못하는 종합적 증명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그에 의하여도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대법원 2008. 3. 27. 선고 2008도507 판결 등 참조)"
결국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간접증거를 종합적으로 고찰할 때 증명력이 인정된다면 '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을 재판부는 피력한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저는 재판부의 판단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재판부의 말처럼 압도적인 다수의 정황과 증거는 남편 백 씨의 범행이라는 공소사실이 '진실'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 분의 일, 만분의 일의 가능성에 불과하더라도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고, 새로운 정황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면 '피고인의 이익대로' 판결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닐까? 당대에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분명했던 판결이 수십 년 뒤 밝혀진 진범에 의해 뒤집힌 사례는 역사를 살펴보면 희귀한 것만은 아닙니다.
진실의 경계가 불분명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누군가 어떤 시점에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죽은 딸과 뱃속의 손주를 9달 동안 냉동고에서 꺼내진 못한 피해자의 유족들도, 어려운 환경에서 피땀 흘려 명문대 의대에 보낸 아들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는 남편 측의 유족들도 삶을 살아갈 테니까요. 결국 누군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정의와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 판결을 내려야 하는 법관들이 짊어진 짐이 가볍지 않음을 새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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