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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저축은행사태…회계법인 부실회계 책임없나②

정호선 기자

입력 : 2011.06.14 08:51|수정 : 2011.06.14 08:51

엔론사태로 공중분해된 '아더앤더슨'


'엔론사태'로 많이 일컬어지는 미국 엔론사의 회계조작, 이로 인한 파산은 엔론이란 기업이 워낙 컸고 전도유망했던만큼 시장에 큰 충격을 남겼다. 1985년 설립된 엔론은 설립 14년만에 미국과 유럽 거래 에너지의 5분의 1을 담당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Fortune지가 엔론을 1996년부터 2001년까지  6년 연속 ‘미국의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한 것만 봐도 당시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위기는 2001년에 불거졌다. 엔론이 수년간 차입에 의존해 무리하게 신규사업을 확장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는데, 이를 감추기 위해 분식회계를 한 것이 발각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계약 체결을 위해 뇌물을 주거나 정치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불명예스런 스캔들까지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회복 불능의 지경에 도달했다.

한때 90달러였던 엔론의 주가는 30센트까지 떨어졌다. 결국 2001년 12월, 파산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각 에너지 부문별로 다른 기업에 매각됐다.

엔론사태의 한복판, 그 화살은 회계법인에도 겨눠졌다. 장기간 동안 이뤄진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 과연 모를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특수목적법인(SPC) 루트 통한 분식회계, 부산저축은행과 유사"

엔론이 사용한 분식회계방법은 부산저축은행과 상당히 유사하다.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들고 이 법인에 부실을 떠넘겨 숨기는 방법이 그것. SPC는 엔론의 부실 자산을 비싼 값으로 사주고 자기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엔론이 지급 보증을 해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으로 재무제표에는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초대형 회계 부정 스캔들로 회계법인 '아더앤더슨'은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당시 미국 회계법인 가운데 5위권에 들 정도로 큰 회계법인이었는데,  명예가 실추되면서 기업들의 계약해지가 잇따랐다.

당시 아더앤더슨은 엔론 사태 이전에 이미 신용에 금이 가 있었다.

여러 개의 회계 스캔들에 휘말렸는데, 사기혐의를 받은 웨이스트 매니지먼트에 대한 회계감사를 잘못하는 바람에 회계법인에 부과된 벌금으로는 가장 큰 규모인 700만 달러의 벌금을 미국 증권관리위원회로부터 부과받기도 했고, 선빔이라는 회사에 대한 회계감사에 문제가 생기면서 선빔 주주들로부터 제소를 당해 1억1천만 달러를 주고 합의를 보기도 했다.

"아더앤더슨, 엔론 사태로 회복 불능...공중분해"

이런 일로 2류 회계법인으로 전락한 아더앤더슨은 결국 엔론 관련 회계자료를 임의로 파기한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독자 생존이 어려운 지경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도 미국 언론들에는 회계법인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대형 회계법인들이 대기업들과 너무 유착돼 있다는 것이고, 엔론-아더앤더슨은 그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는 것.

미국도 마찬가지로 대형 회계법인의 주수입이 이들 대기업에 대한 경영 자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고객인 대기업들에 대한 회계감사가 엄격할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다른 회계법인에 일감을 빼앗길까봐 부적절한 관행을 알고도 눈감아주는 사례가 많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부정 회계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회계법인의 분식 회계 방조, '고의성' 입증 안 되면 유죄 판결 어려워"

그런데 회계법인의 분식회계 방조가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동시에 엔론사태가 보여주고 있다.

2005년 6월 엔론의 분식회계를 눈감아준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회계법인 아더앤더슨에 대해 미국 대법원이 증거 부족을 이유로 평결을 뒤집었다. 수년 간의 법정 다툼을 거쳐 대법원까지 간 이 사건은 미국 대법원이 "아더앤더슨이 엔론의 회계관련 문서를 파기했다는 판결은 중요한 측면에서 흠결이 있다"며 만장 일치로 사건을 하급심으로 되돌리면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부실 감사에 대한 혐의는 인정되지만 고의로 분식 회계를 눈감아줬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물론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해도 큰 의미 없다. 대법원의 무죄 선고 이전에 미국 최고 역사를 자랑하는 회계법인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매출 90억 달러에 세계 84개 국에 8만5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었던 아더앤더슨은 결국 상장기업 회계감사 업무를 중단한 후 컨설팅 사업을 KPMG에 넘겨주면서 해체됐지만, 뒤늦게 법적인 책임을 물긴 어렵다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이번 부산저축은행 사태 이후 검찰과 금융당국은 부실감사를 한 회계법인에 대해 형사고발하거나 금융업종 회계를 맡지 못하게 하는 등 강도 높은 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회계부정의 경우 작정하고 부정에 연루되거나 묵인을 해준 정황이 있어야 처벌이 가능하다. 즉 고의로 덮어준 것은 해당돼도 모르고 하면 괜찮다는 것으로, 그 '고의성'을 입증하는 것이 엔론사태만 봐도 상당히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엔론이 파산한 지 10여 년이 넘었다. 아직까지도 기업 비리의 대명사로 남아있는 엔론사태. 당시 엔론 CEO였던 제프리 스킬링은 각종 유령회사를 만들어 엔론의 부채를 털어내는,  자신의 주장대로라면 '혁신적인 기법'을, 외부에서 보기엔 명백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24년4개월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미국에서도 20년 이상의 형을 예측했지만 상당한 중형이어서 충격을 줬다. 회계부정 스캔들을 엄단하겠다는 법원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평가였다.

엔론 스캔들은 미국의 상징적인 ‘기업 사기’ 사건으로 기록되면서 ‘화이트 칼라’ 범죄에 대한 단속과 형벌을 대폭 강화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저축은행 사태로 상당한 수업료를 치르고 있는 우리 금융산업. 이런 것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번 기회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개선안이 마련돼야 한다. 부실감사 회계법인, 솜방망이 징계, 다시 기업과의 유착, 끊이지 않는 이 고리, 쉽지는 않겠지만 끊어야 더 큰 피해를 미리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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