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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갑옷도 'tailor-made'

권란 기자

입력 : 2011.05.19 16:19|수정 : 2011.05.20 11:09

1500년 전 고구려 철제 갑옷 첫 출토


사극에 나오는 장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번쩍번쩍하고, 무지 거대해 보이는 갑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저걸 입고, 말을 타고, 거기에다 자기 몸집의 반은 되어 보이는 무기를 들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 "잘 싸울 수나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드라마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가끔 역사학자나 복식학자들이 역사 드라마나 영화의 고증이 다 엉터리라고, 시청자들에게 거짓 역사를 말한다고 비난하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진짜 역사 속 장수들은 어떤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갔을까요.

며칠 전 경기도 연천에서 고구려 철제 갑옷이 원형 거의 그대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경기도 연천 지역은 삼국시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격렬하게 부딪히던 곳이었습니다. 실제로 임진강가를 따라서 수많은 삼국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곳도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던 무등리 2보루입니다. 이곳에서는 3300㎡에 달하는 구릉을 따라서 고구려 성곽 흔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당한 양의 탄화미와 곡식도 발견됐는데, 꽤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그동안 고구려 갑옷은 원형 그대로 나온 적이 남북한, 중국까지 통틀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고구려 갑옷의 모습은 벽화에 그려진 그림과, 부분적으로 발견된 조각을 보고서만 추정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갑옷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집안 삼실총 벽화 모습-투구와 갑옷을 입고, 긴 칼을 찬 장수 모습

고구려 갑옷이 아직까지 발견이 되지 않은 이유는 고구려에서는 분묘를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라나 백제는 장수가 죽으면 무기와 갑옷을 분묘 안에 가득 넣어뒀기 때문에 종종 발견되고 있는데요. 고구려는 죽은 자의 재물을 길거리에 꺼내어 놓고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무덤 안에서 변변한 유물이 나오지 않는거죠. 또,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의 갑옷은 대부분 전리품으로 승전국이 가져가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거의 없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견된 갑옷은 어떤 사연이 있어서 땅 속에 파묻힌 채 발견이 됐을까요. 일단 갑옷이 발견된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갑옷은 출입구로 사용되던 기둥 바로 옆에서 발견됐습니다. 위에서 땅으로 떨어진 모습 그대로였죠. 주변에서는 불에 그을린 자국도 발견됐습니다. 연구진은 아마 적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장수는 미처 갑옷도 입지 못하고 당했던 게 아닌가 라는 추측을 내놨습니다. 그리고 전투 자체가 워낙 혼란스러워서 적군도 전리품으로 갑옷을 챙길 여유조차 없었던 거고요. 그럴듯한 설명입니다.



조각조각 보이는 것들이 갑옷을 둘러싸고 있는 철조각(찰갑편)입니다.

옆에 보이는 가운데가 뻥 뚫린 돌이 바로 출입문 기둥 자리입니다.

고구려 군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말에도 갑옷을 착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덮을 개 蓋, 말 마 馬를 써서 '개마무사'라고도 불렸습니다. 특히 고조선을 계승한 만큼, 철기 문화도 상당히 발달했습니다. 갑옷도 어떤 화살이나 칼도 막을 수 있는 단단한 철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철갑옷은 아니었습니다. 철을 3×5㎝ 크기부터 10×20㎝의 크고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이 조각들을 신체 모양과 크기에 맞춰 가죽끈이나 철끈으로 이어 엮은 갑옷이었습니다. 조각들을 이어 붙었으니 물고기 비늘 모양처럼 보이겠죠. 그래서 '미늘갑옷'이라고도 불립니다. 고구려 장수는 이 미늘갑을 목을 비롯해, 상의, 하의까지 입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발에는 징이 박힌 전투화를 신었죠.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적의 공격을 받을 경우, 발로도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바닥에 뾰족한 징을 달아놓은 것입니다.

                              

보도CG실에서 만든 고구려 장수 모습 CG입니다.

온통 철갑옷을 입은 늠름한 모습입니다.

철 조각을 하나하나 이어 붙인 갑옷은 고구려 군의 전투력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선, 하나씩 조각을 이어 붙이는 형태이다 보니, 개개인의 몸에 꼭 맞는 갑옷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덩치가 크면 조각을 더 붙이고, 덩치가 작으면 몇 개 빼면 되니까요. 이른바 '테일러 메이드' 맞춤복인 것입니다. 신축성도 통 판으로 만든 갑옷보다 좋아서 움직임도 더 자유로웠습니다. 신체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건 싸움터에서 중요한 요건 중 하나죠. 유지와 보수도 훨씬 수월했습니다. 전쟁 중에 조각이 몇 개 떨어지면 그것만 다시 붙이면 됐으니까요. 게다가 같은 모양의 철 조각만 만들어 놓으면, 거기에 끈만 이으면 갑옷이 완성이 됐기 때문에 대량 생산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초를 다투는 전쟁터에서 갑옷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 병사에게 입히면 전투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겠죠.

고구려 갑옷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이후 일본 등지에서도 제작 방법 등을 배워 갔다고 합니다. 어쩌면 한류의 시초가 이때부터라고 볼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아무튼 이번 발굴이 고구려 역사와 복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에, 고구려 역사는 우리 땅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큰 소리도 칠 수 있는 기회도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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