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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춘 검사장님께 드리는 편지

임찬종 법조전문기자

입력 : 2011.02.09 08:59|수정 : 2011.02.09 10:03


저는 법조를 오래 출입한 몇몇 선배들처럼 검사장님과 깊은 인연을 맺은 기자가 아닙니다. 직접 만난 것은 4번뿐입니다. 한 번은 의례적인 만남이었고, 세 번은 불편한 마주침 이었습니다. 출입처 발령 인사차 서부지검 집무실에 찾아간 것이 한 번, 나머지 세 번은 뜻하지 않은 곳에 나타난 저를 보고 검사장님이 불편함을 표시했던 것이 다였습니다. 인연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참으로 소박한 추억입니다. 그러나 퇴임식도 없이 물러난 검사 남기춘의 퇴진을 바라보면서 저는 무거운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세간에서는 검사장님의 퇴진을 한화 그룹 비자금 수사 결과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 무리하게 수사했고, 과도하게 영장을 청구해, 결국 실패한 수사의 책임을 지고 검사장이 물러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인사에서 검사장급 가운데 유일하게 남 검사장님만 ‘원포인트 교체’한다는 소문에 먼저 사의를 표명해 명예를 지켰다는 분석도 있는 모양입니다. 후배 검사들에게 미흡한 수사 결과에 대한 책임이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직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선은 아니었지만 무리도 아니었다

이 모든 추측들의 전제는 '한화 비자금 수사는 무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수사가 무리했다는 비판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기업 총수를 3번이나 부른 것이 무리였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김승연 회장에게 걸린 혐의는 1천억 원이 넘는 횡령과 3천여억 원의 배임 등입니다. 검찰 주장 대로 모두 인정된다면 짧게는 12년 8개월, 길게는 20년의 실형이 선고될 수 있는 중대한 범죄 혐의입니다. 검찰은 또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데 8년에 걸쳐 수 많은 관련자들이 최첨단의 회계 및 경영 기법을 동원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안을 충분히 조사하는 데 3번의 소환이 과연 많은 것일까요? 김승연 회장이 대기업 총수가 아니라 ‘자연인 김승연’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때도 과연 이 같은 중대하고 복잡한 혐의에 3번의 소환이 많다고 비판했을까요? 정의의 여신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판 대상의 신분과 정체를 알 지 못해야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과연 정의의 여신은 ‘대기업 총수’를 소환할 때는 몇 번이 적당하다고 했을까요?

너무 잦은 압수수색이 경영 활동을 마비시켰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20여 차례에 걸친 계열사와 ‘관계사’ 압수수색이 유례 없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관계사’라는 곳은 대부분 한화 측에서 한화 계열사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던 곳입니다. 한화 그룹과 공식적 관계가 없는 회사를 압수수색하는 것이 왜 한화그룹의 경영 활동에 지장을 주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한화는 ‘관계사’인 경비용역회사가 서류철을 청계산 비닐하우스에 숨긴 것을 두고, 한화 측과는 관계없는 행위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20여 차례의 압수수색’이 과도하다고 밝힐 때는 아무래도 관계가 없는 관계사도 ‘20’이라는 숫자에 포함시킨 듯 싶습니다. 관계사와 한화의 관계는 상당히 유동적인 것 같습니다.

한화 측은 수사가 지나치게 장기화돼 그룹 이미지에 막대한 타격을 줬다고 말합니다. 한화증권 및 투신과 외국계 증권사의 합병 신청 허가가 보류된 것, 대한생명 사명 통합을 예금보험공사가 반대한 것 등을 ‘무리한 수사’로 인한 대표적 피해로 한화 측은 꼽고 있습니다. 김준규 총장이 강조한 ‘환부만 도려내는 수사’ 방침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말도 있더군요.

더 빨리 수사가 진행됐다면 물론 더 좋은 수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경우를 비교해보면 과연 ‘지나치게 장기화된 수사’였는지는 의문입니다. 이번 수사가 진행된 기간은 5개월입니다. 한화 그룹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기간은 8년입니다. 재벌 그룹의 핵심 인력들이 8년 간에 걸쳐 최첨단의 방식으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에 비해 다섯 달이 과연 무리하게 기나긴 수사 기간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서부지검보다 수사 인원과 수사 지원 역량 면에서 훨씬 우월한 대검 중수부 등이 현대자동차 그룹을 수사할 때 4개월이 걸렸고, SK그룹을 수사할 때도 3개월 이상 걸렸습니다.

물론 저는 검찰의 공소내용을 모두 진실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한화가  유죄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도 아닙니다.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지겠지요. 다만 수사가 ‘무리했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더구나 상대가 약자가 아니라 거대한 힘을 가진 재벌 집단이라면, 검찰이 지나치게 힘을 썼다는 비판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검사 남기춘이 저렇게 가면 이제 누가 재벌 수사를 하겠는가?”

한화 비자금 관련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봉욱 서부지검 차장 검사는 '재벌의 차명비리-기망 경영에 대한 원칙적 대응'이었다고 자평했습니다. 모든 일에 정치적 고려가 빠지지 않는 요즘 세상이지만, 적어도 ‘검사 남기춘’이 지휘한 이번 수사에 '원칙적'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조금도 어색함이 없어보입니다.

한나라당 대선자금 수사를 하면서, 남기춘 대검 중수부1과장(당시 직책)이 삼성에 대해 강공을 폈다. 당시 남기춘 검사는 삼성 구조본 압수수색과 이학수 구속을 주장했다. 남기춘 검사는 나와 사법시험 동기였다. 그래서 구조본에서 내게 거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검사가 의지를 갖고 수사한다는 데 어떻게 말리겠나.

이학수가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날, 나도 동행했다. 내가 검사실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남검사가 나더러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변호사 선임계를 내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中 -

'원칙주의자' 또는 '당대 최대의 강골'이었던 검사장님이 이제 검찰을 떠났습니다. 어떤 법조인이 그러더군요. "검사 남기춘이 저렇게 물러나면 앞으로 누가 비리 재벌 수사를 할 수 있겠나?" 검사장님의 퇴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부디 이런 걱정이 현실로 드러나지 않길 바랍니다. "거악(巨惡)이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검찰의 사명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