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마음 속에 건물 짓기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구호, 많이 들어보셨을 줄 안다. 이 구호에 대한 단상. 최근 클럽발코니 씨엘로스 웹진에 기고했던 글이다.
문화부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 말부터, 나는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구호를 참 많이 들었다. 지금은 2010년. 21세기가 된 지도 10년이 지났는데, 과연 나는 '문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 10년 전과 비교해 지금이 더 '문화의 시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겉보기엔 문화행사도 많아지고 문화시설도 늘어났지만, 본질적으로는 별로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국을 다녀갔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를 인터뷰했다. 그에게 '클래식 음악의 미래’에 관해 물었더니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세상이 점점 돈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클래식 음악을 포함한 ‘문화예술'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는 문화예술은 '정신의 양식'이고, 문화에도 투자가 필요하다며, 문화가 정부 정책의 주요 분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돈을 투자해서 큰 건물을 짓는 것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에만 투자하려 합니다. 하지만 내면 세계는 어떤가요? 만약 돈을 투자해서 사람들이 전시회나 공연을 가게 되면, 그들의 마음 속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똑같이 큰 건물을 짓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보이지 않는 데 돈을 투자해야 하지?' 하고 물어요."
얀손스의 말처럼, 정신의 양식에 투자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건물'에 투자하는 것은 자주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문화에 쓰는 돈은 많은 경우 '불요불급'한 돈으로 여겨진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면 대개 가장 먼저 줄이는 게 문화 경비다. 방송 뉴스에서도 기사가 넘치면 가장 먼저 문화 뉴스가 빠진다. 정부 재정이 어려울 때는 문화 예산이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 최근 많은 일간지가 문화 면을 줄이고, 경제 면을 늘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국에서 문화 정책을 공부할 때 친해졌고, 지금은 영국의 한 오페라 극장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도 착잡한 소식을 전해왔다. 내가 관심 있을 것 같다며 안부 편지에 첨부한 아츠카운슬(영국 문화예술위원회) 뉴스레터에는 영국의 문화예술 지원 예산이 대폭 줄어들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영국 총리가 된 후 정부예산 대폭 삭감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하더니, 역시나 문화예술 분야가 직격탄을 맞았나 보다.
영국은 아츠카운슬을 통해 문화예술 지원금을 배분하고 있는데, 이 지원금 예산이 앞으로 4년간 30퍼센트나 줄어든다고 한다. 내년 7,100만 파운드(한화 약 천 3백억 원) 감축을 시작으로 매년 감축액을 늘려가 2014년에는 1억 4,500만 파운드(한화 약 2천 6백억 원)이 줄어들게 된다. 아츠카운슬 예산 감축액 4억 5천 7백만 파운드(한화로는 약 8천 2백억 원)은 전체 영국 정부재정 감소액 중에서는 고작 0.33%를 차지하니, 재정 감축 효과는 정말 미미하다. 하지만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심대한' 타격을 의미한다.
영국 아츠카운슬 수장인 알란 데이비는 '영국인의 문화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아츠카운슬 측에서는 이런 상황에서는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내셔널 시어터 같은 문화예술 기관들에 지급해온 정부 지원금을 15퍼센트 이상 감축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감소폭 15퍼센트는 아츠카운슬이 제시한 '마지노선' 같은 것이었다.) 아츠카운슬은 이에 더해 자체 운영예산과 인건비도 2012년까지 절반으로 줄이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이미 운영예산을 15퍼센트 감축한 판에 추가로 50퍼센트를 줄이라는 것이니, 이는 굉장히 가혹한 요구라는 게 아츠카운슬 측의 주장이다.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그들의 앞선 문화예술 지원 시스템이 부러울 때가 많았는데, 영국도 어렵구나. 안 그래도 몇 달 전부터 문화부에 복귀해 일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참이었는데, 친구의 편지를 읽고 더 갑갑해져서 나도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구호에 회의를 느낀다고 답장을 써 보냈더니, 다시 이런 편지가 왔다.
"뭐? 21세기가 문화의 시대라고? 나는 못 들어봤는데 누가 그랬어? 하긴, 1세기는 100년이나 되니까 나중에 중국이나 인도가 잘 나가면 혹시 모르겠네……. 여긴 정말 악몽이야. 이번 문화예산 감축은 정말 재앙이야. 문화예산만 줄어든 게 아니라 대학의 인문 예술 관련학과에 대한 지원도 확 줄었어. 계속 이렇게 가면 앞으로는 문화예술 향수층 자체가 없어질지도 몰라. 우린 정말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탄이 묻어나는 글에 나도 기운이 쪽 빠졌다. 한국의 공연장에서 일하다 지금은 독일 유학 중인 후배에게 요즘의 내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며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유럽 생활을 경험하면서 한국에서 오페라라는 것을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삶 속에 스며든 이들의 '문화'라는 것의 깊이와 범위를 지켜보면서 절망하기도 했었고요……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문화가 삶의 일부가 되는 때가 오리라 믿어요. 또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할 거고요."
하긴, 내가 문화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문화계가 풍족했던 적이 있었던가. 계속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었고, '최악의 위기' 아니었던가. 작금의 상황이 어렵다 해서 새삼스럽게 우울 모드에 빠질 것까지야. '믿고 노력하겠다'는 후배의 말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진정한 '문화의 시대'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가 삶의 일부가 되는 시대를 이를 것이다. '문화의 시대'가 언제 올지, '문화의 시대'가 과연 오기는 올지 때로는 회의하지만 계속 믿고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 속에 건물을 짓는 것처럼, 당장 티가 나지는 않지만 내가 쓰는 글과 내가 만드는 TV 뉴스 리포트 하나하나가 언젠가 문화의 시대를 떠받치는 벽돌 한 장이라도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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