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 핵 정책을 놓고 다시 한번 기로에 섰다.
최근 방북한 지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 등을 통해 공개한 영변의 경수로와 원심분리기 시설을 통해 북한이 '우라늄농축 카드'를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북한의 움직임은 오바마 대통령이 기치로 내걸고 있는 글로벌 비확산 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북한은 현재의 영변 핵 프로그램이 전력생산을 위한 저농축우라늄 생산용이라고 주장하지만, 핵무기를 위한 고농축우라늄 생산도 가능한 설비들이다. 기존의 플루토늄 핵무기가 아니라 우라늄 농축 핵무기도 만들 수 있음을 과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상 뛰어넘은 규모의 원심분리기 = 미 행정부 당국은 무엇보다 북한이 공개한 원심분리기의 규모에 주목하고 있다.
북한은 헤커 소장에게 영변의 원심분리기 시설을 시찰토록 하면서 "2천개의 원심분리기가 있다"고 주장했고, 헤커 소장도 "1천개가 넘는 원심분리기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원심분리기는 우라늄농축에 필요한 핵심적 설비이다. 미국을 비롯, 국제사회는 지난 2002년 북한 우라늄농축 문제가 불거진 이후 원심분리기 제작에 필요한 각종 원자재 및 물품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차단해왔다.
헤커 소장도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원심분리기가 영변 시설에 구축된 것을 목격하고 "너무나 충격적(stunning)"이라고 표현했다. "2천개의 원심분리기는 나나 다른 대다수 전문가들의 예상치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라고 헤커 소장은 지적했다.
북한이 주장하는대로 2천개의 원심분리기를 통해 연간 8천kg SWU(Seperative Work Unit: 농축서비스 단위) 생산 용량을 갖고 있다면 핵무기 연료로 사용되는 고농축우라늄을 해마다 40kg까지 생산할 수 있다. 고농축 우라늄 40kg은 핵무기 2개를 제조할 수 있는 분량이다.
문제는 국제사회가 모르는 사이에 원심분리기 2천개를 구축한 것처럼 별도의 장소에 고농축 우라늄용 설비가 더 존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우라늄농축 시설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에 비해 찾아내기가 훨씬 어렵다.
미 행정부 고위관계자는 "북한은 아마 다른 시설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해 북한이 이번에 공개한 시설 외에 원심분리기 등이 설치된 다른 우라늄 농축 시설도 보유중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원심분리기 어떻게 확보했나 = 핵군축 싱크탱크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의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소장은 지난달 '북한 우라늄농축 프로그램' 보고서에서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개발이 실험실 단계를 넘어 우라늄을 농축하기 위해 시범적인 공장을 건설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는 분석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세계 여러 정부로부터 얻은 북한의 조달 자료와 파키스탄에서 나온 정보 등을 바탕으로 북한이 지금까지 500∼1천개의 원심분리기를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파키스탄의 압둘 카디르 칸 박사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중국으로부터 물품을 조달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헤커 소장은 과거 북한과 이란의 우라늄 농축 기술 협력 가능성도 거론한 바 있다.
북한이 영변 원심분리기 2천개를 모두 가동할 수 있는 수준인지는 미지수이다. 8천개의 원심분리기를 가졌다는 이란의 경우 원심분리기를 개발하고 가동하는데까지 20년이 걸렸다고 전문가들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영변 시설 책임자는 이번 방문길에 헤커 소장에게 "현재 영변 원심분리기 설비에서 우라늄농축이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북한은 자신들의 원심분리기가 파키스탄의 P-1형 원심분리기가 아니라 네덜란드, 일본 모델을 본떠서 자체 물품과 기술로 개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의 제재망을 뚫고 자체적으로 핵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 있다는 과시인 셈이다.
◇美 대북정책 영향 미칠까 =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 공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20일 한국, 일본, 중국과 대응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아시아로 날아갔다.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은 21일 북한이 유엔안보리 결의 및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며 북한의 호전적 행동이 또 드러났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우라늄 농축 카드를 꺼내든 것이 다목적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고 일단 한국, 일본과의 공조에 주력하면서, 중국에는 북한에 대한 우려를 전하며 북한에 대한 압박 강화를 유도할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북한의 우라늄농축 '시위'가 군사용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지만, 이번 북한의 원심분리기 공개 압박전술이 미국의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북한의 호전적 행동에 대해 화들짝 놀라 협상 테이블을 펼치고 '대가'를 지불하는 과거 패턴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미 행정부와 의회에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어떤 대화도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실질적 협상이어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 소식통도 "보즈워스 대표의 아시아 방문도 대북정책 점검이나 변화를 모색하는 성격이 아니라 방북한 전문가들을 통해 전해진 영변 시설에 대한 정보 사항을 점검하고 인식을 공유하는 성격이 될 것"이라며 "시간을 다퉈 국면이 대화로 바뀌거나 할 것 같지는 않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북한의 상황 전개는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또 다른 '핵 위기'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전략적 인내'를 기치로 내걸고 북한의 비핵화 이행과 태도 변화를 촉구하고 있지만, 오히려 북한은 우라늄농축 시설을 공개하며 핵 프로그램을 갈수록 진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하고 추가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북한의 핵무기 위력은 커진다. 게다가 북한이 보유한 우라늄농축설비인 원심분리기를 포함한 위험 물질의 수출 가능성도 비확산체제를 심대하게 위협한다는 점에서 미국이 마냥 기다리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대목이다.
겉으로는 이견이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미 행정부내에 백악관과 국무부 등 관련부서내에 미묘한 인식차가 존재하고 있고, 대북접근법의 조정 필요성도 싱크탱크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어 이번 사태의 대응 방향이 주목된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보즈워스 대표가 아시아 순방을 마무리하고, 종합적인 결과를 백악관과 국무부에 보고한 이후 대화의 숨통을 여는 쪽으로 미세 조정을 하느냐, 아니면 제재.압박을 강화하며 북한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기존 노선을 유지하느냐의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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