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명대사들 가운데 유독 뇌리에 깊히 새겨진 말이 있습니다. "모래알이든 바위 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극의 주인공인 최민식이 20년 넘는 감금생활 끝에 풀려나온 뒤 자신을 가뒀던 유지태로부터 전화를 통해 들은 말입니다.
극중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면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죄의 크기와 상관없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기는 마찬가지다, 또는 애초 죄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뜻입니다.
극중 최민식은 학창 시절 자신이 목격한 근친상간 장면을 친구에게 떠벌이는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다가 그들의 삶은 물론 자신의 삶마저 극단적 비극으로 몰아넣습니다.
최근 서울중앙지검이 수사한 세무공무원들의 비리 사건을 취재하면서 불현듯 이 대사를 떠올렸습니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전직 국세청 공무원인 남 모 씨가 회계사 자격증을 딴 뒤 세무회계사무소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중견 IT기업인 T사의 고문회계사로 발탁됐습니다.
그런데 이 T사는 2005년 당시 코스닥 상장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성공하면 대주주들은 떼돈을 벌 수 있었기에 상장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T사의 경영인들이 하지도 않은 거래를 허위로 꾸며 장부를 조작하는 등의 분식회계를 하고 회삿돈을 빼돌린 정황이 세무당국에 포착된 것입니다.
관할 세무서에서 특별세무조사에 나섰습니다. T사 경영진의 이런 잘못이 세무조사를 통해 드러나고 검찰에 고발이라도 되면 상장은 완전히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이때 남 세무사가 나섰습니다. T사로부터 로비 자금조로 2억 원을 받은 남 세무사는 국세청에서 쌓은 인맥을 동원해 최초 T사의 비위행위를 포착했던 세무서의 원 모 계장에게 접근했습니다. 남 세무사는 원 계장에게 특별세무조사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고 원 계장은 이 사건을 넘겨 받아 세무조사를 직접 수행하고 있던 오 계장에게 이런 청탁을 전했습니다.
실제 T사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는 사소한 2가지 사항만 지적한 채 유야무야됐고 T사는 2년 뒤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습니다. 원 계장과 오 계장은 청탁을 들어준 대가로 남 세무사로부터 각각 3천만 원과 5천만 원을 받았다는 것이 검찰의 조사 결과입니다.
청렴결백해야 할 세무공무원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비위행위입니다만, 어쩌면 당시 원 계장과 오 계장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뭐, 수천 억, 수조 원씩 분식회계를 한 대기업들도 있는데 이런 중소기업의 분식회계쯤 눈 감아준다고 무슨 큰 일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기업주들이 다 그렇지, 얼마쯤 회삿돈을 유용하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리고는 고작(?) 수천만 원씩을 받고 특별세무 조사 결과를 무마해줬습니다. 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사소한 비리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집니다. 코스닥 상장에 성공한 T사의 이모 대표와 임원들은 분식회계의 규모를 계속 늘려 4개 금융기관으로부터 360억 원을 사기 대출 받고, 110억 원 이상을 횡령했으며 이와 별도로 회삿돈 203억여 원을 동원해 차명계좌로 자사 주식을 사들이며 주가를 조작한 사실이 검찰 조사결과 드러났습니다.
경영진들이 이렇게 부도덕하게 운영하니 회사가 버틸 재간이 있겠습니까? 이들은 더이상의 분식회계로는 회사 부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자신들의 지분만 사전에 처분한 뒤 2008년도 연말사업보고서를 내지 않아 2009년 4월 회사가 상장폐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시가 총액 475억 원 짜리 회사가 무너지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1900명에 달하는 소액주주들이 떠안아야 했습니다. 또 이들이 사기대출 받은 360억 원 가운데 지금까지 변제된 금액은 11억 원에 불과해 나머지 돈은 금융기관들이 메워야 했고요. 1900명에 이르는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기구한 사연을 낳았겠습니까? 누구는 피땀 흘려 모았던 종자돈을 날렸을 것이고, 누구는 대출까지 받아 투자했다 깡통을 차게 됐을 것입니다. 가정이 파탄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꿈을 잃고 방황하게 된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억울함을 풀겠다며 T사의 이 모 대표와 임원인 또다른 이 모 씨를 고발했고 검찰 수사로 두 이 씨는 구속기소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액주주들의 피해가 복구되지는 않죠. 이들의 상처는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두 명의 세무공무원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수천만 원에 양심을 팔아버린 결과가 이런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이번 사건은 그나마 자초지종이 밝혀져 사필귀정의 수순을 밟고 있기라도 합니다만, 이와 유사한 사례가 얼마나 많이 발생했다가 그냥 묻혀서 지나갔을까요. 몇몇 권력기관 종사자의 사소한 비리가 얼마나 많은 서민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피해를 당하도록 강요했을까요.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이 말에 그토록 등골이 서늘했던 것은 이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수많은 일들을 너무나 쉽게, 또 많이 접했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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