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뉴스

뉴스 > 사회

'피의자 스케치'의 고민 - 연출은 그만두자

임찬종

입력 : 2010.09.15 10:02|수정 : 2010.09.16 11:05


'언론 홍보의 달인' 광역수사대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청장의 별동대다. 서울에서 가장 수사를 잘하고, 승진을 갈망하는 형사들이 모여있는 조직이다. 언론보도에도 민감하다. 언론사 보도가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경찰 시스템 때문이다.

특히 지상파 메인뉴스에 담당 사건이 리포트로 방송되면 보도자료를 발표한 수사팀은 20점이라는 적지 않은 점수를 받는다. 어떻게든 자신의 사건이 방송에 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광역수사대 내부에 수사과정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전문적인 영상팀이 있을 정도다. 단언컨대,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이하 광수대)는 세계 어느 곳의 경찰 조직보다 언론 홍보 감각이 뛰어날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광수대는 지게차, 굴삭기 등 소형 건설기계 면허를 교육 없이 발급해주는 건설기계 학원장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압수해온 서류와  면허증이 가지런히 기자들 앞에 펼쳐졌다. 관리를 맡은 교육청과 구청 직원들 인터뷰도 형사들이 섭외했다. 보기좋게 진열된 아이템들을 1~4년차 방송기자 대여섯 명이 부지런히 '스케치'했다.

'피의자 스케치'의 고민

문제는 '피의자 스케치'다. 광수대 형사들이 제공하는 자료만으론 방송기자들 성에 차지 않는다. 기자들이 가장 촬영하고 싶은 그림은 '피의자'다. 시청자들에게 '누가 나쁜 놈'인지 알려주고, '나쁜 놈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것은 대한민국 방송사 경찰 리포트의 핵심이다. 수건과 양복 상의를 둘러 쓴 모습일라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형사들도 적극 협조한다. 피의자들을 조사하는 장면을 공개한다. 아니, 방송 촬영을 위해 유치장에서 꺼내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입을 열지 않으려는 피의자들을 얼러가며 몇 마디 말을 받아낸다. 방송 기자들은 만족한다. 광수대가 잘 차려놓은 화려한 증거품 촬영 영상과 함께 피의자의 목소리는 그날 저녁 지상파 전파를 타고 시청자들의 안방에 도착한다.

3년째 해오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불쾌한 일이었다. 재킷을 뒤집어쓰고 입을 열지 않으려는 피의자. 피의자의 방어권 보장보다는 나쁜 놈이라는 고백을 듣기 위해 노력하는 경찰. 무슨 말이 됐든 어쨌든 몇 마디라도 녹취하기 위해 애쓰는 풋내기 기자들. 경찰서 안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풍경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 역시 이 과정에 여러번 동참해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다른 회사 뉴스에 나가는 건, 나 역시 꼭 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연출'은 그만두자

피의자를 촬영하거나 진술을 듣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피의자가 원하지 않더라도 기자는 질문할 수 있고, 대답을 받아내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 수 있다. 나는 오히려 실명과 얼굴도 최대한 공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금처럼 혐의 사실에 대해 실명과 얼굴 공개를 피하는 것은 결국 대기업이나 권력집단처럼 잃을 것이 많은 이들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의 '피의자 스케치'는 안 된다. 경찰과 기자가 피의자를 둘러 싸고 대답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형벌이다. 피의자가 진술을 거부해도 촬영할 수 있다는 게 내 입장이지만, 거부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몰아 넣는 것은 '취재'가 아니다. '연출'이다.

해결 방법은 있다. 경찰 인사 고과에 언론 보도 횟수를 반영하는 규정을 폐지하면 된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건을 수사하고 해결하는 것은 경찰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측정의 척도가 반드시 언론보도의 '크기'와 '횟수'가 될 필요는 없다.

언론 보도에 목을 매는 경찰은 반드시 오버한다. 기자들도 이를 적당히 이용한다. 피의자와 경찰과 기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경찰은 달라져야 한다. 경찰은 수사를 해야 하고, 기자는 취재를 해야 한다. 연출은 그만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