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말 대한적십자사가 100억 원 규모의 수해지원을 제의한 데 대해, 북한이 지난 4일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기왕 수해지원을 하려거든 비상식량이나 의약품 말고 쌀과 수해 복구에 필요한 시멘트, 굴착기, 중장비 등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북한 조선적십자위원회가 남측 대한적십자사에 보내는 '답신' 형태였지만, 정부와 민간 기구의 구분이 모호한 북한의 특성에 비추어, 북한 정부가 남측(정부)에 공식 구호요청을 해 온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늘 '부족하고 배고파도 우리 식으로 산다'던 북한이, 그들이 '역적패당'이라고 비난하는 이명박 정부에 손을 벌린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난 7월 중순부터 계속된 집중호우와 지난 주 중부지방을 강타한 태풍 '곤파스'로 인한 피해가 상당하다는 얘깁니다.
지난 7월 우리가 임진강을 타고 떠내려온 '목함지뢰'로 부산할 때에는 수해에 대해 입을 꾹 다물어 오던 북한 언론도 지난 달 중순 이후부터는 각 지역의 수해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하더니, 결국 자력으로는 수해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존심 상하지만 고백한 셈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나포한 대승호를 한 달만에 풀어주면서 '쌀 지원을 잘 부탁한다'는 신호까지 우리 정부에 보냈습니다.
당초 북한에 제의한 100억 원 규모의 수해지원은 대한적십자사 명의의 '인도적 차원'이었습니다. 천안함 사태 이후 유지되고 있는 이른바 5.24 대북조치의 유일한 예외 조건, 즉 취약계층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범주 안에서 지원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추곡수매를 앞두고 국내에 쌀 비축분이 필요한 양의 두 배를 웃도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 일각에서 소리높여 제기하던 '대북 쌀지원' 목소리에도 정부는 5.24 조치를 흔들 수 없다며 애써 눈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당에 북한이 '쌀을 콕 찍어서' 요청한 겁니다.
쌀은 우리 민족에게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먹고 사는 행위의 근간이며, 정서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북한에 쌀을 지원하는 행위는 곧 남과 북이 한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확인하고, 이를 강화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가 북한에 쌀을 지원하는 것은 옥수수나 밀가루를 지원하는 것과는 의미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격이 한참 높아집니다.
그래서 정부는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천안함 사태가 아직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인도적 지원이라고는 해도 쌀을 북한에 보낸다면, 이번 정부로서는 특히나 불편하기 짝이 없을 '퍼주기' 논란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남북 교류와 대북 지원을 최소한으로 축소한 '5.24 조치'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행정명령까지 발동하며 강도높은 대북 추가제재를 발표한 미국에 눈치가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쌀 지원을 통해 웬만해서는 자존심 때문에 '앓는 소리' 하지 않는 북한을 잘 달래서 대화의 장으로 끌고 나오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습니다. 북한이 추수 전에 당장 필요한 식량은 약 40만 톤인데, 이번 수해로 10만 톤의 수확을 날려버린 것 같다는 추정이 나와 있습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어제(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쌀 지원도 당초 한적이 제의한 100억 원 한도 내에서 검토하겠다고 말했지만, 그 100억으로 살 수 있는 쌀이 1만 톤 남짓임을 감안하면, 기왕 줄 바에는 아예 '통 크게' 지원해서 북한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아직 결론을 내지 않았지만, 쌀 지원 문제의 결론에 따라 정부가 보는 대북 정책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쌀 지원 문제의 결정 방향에 따라 '5.24 대북 제재조치'의 수명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0억 원 한도 내에서, 즉 1만 톤 정도의 '상징적' 지원조치에 그친다면 정부는 북한과는 앞으로도 당분간 거리를 두겠다는 뜻을 드러내면서 대북 제재 원칙을 강조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100억 원이라는 틀을 깨고 실제로 북한이 놀랄 만한 지원을 한다면 국제적으로는 '대인배' 소리를 듣겠지만, 보수파의 지지는 상당 부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에 양이 어느 정도가 됐든 쌀 지원을 하려면 남북 당국(적십자)이 지원의 양과 전달 방식, 분배 투명성 확보 방법 등을 놓고 얼굴을 맞대야 합니다. 남북이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는 행위 자체가 '5.24 대북 조치'의 취지를 훼손하는 건지, 아니면 이건 '인도적 지원'이니까 괜찮은 건지에 대한 유권 해석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래저래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정부가 안고 있는 고민의 깊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북한의 이번 제안에 역으로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기민함과 대담함'이 결국 수해로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북 관계, 그리고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의 눈치 빠른 정치적 생존을 위해 쓰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이내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정부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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