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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사법화

한승환

입력 : 2010.09.09 11:01|수정 : 2010.09.09 16:22

케이블TV 저작권 소송에 부쳐


법원이 케이블TV에서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을 동시 재송신하는 건 위법하다고 판결했습니다. 물론, 지상파 방송사들에 사용료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당장 케이블TV에선 지상파 방송을 볼 수 없게 되는걸까…. 단견이지만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전 국민의 80% 정도가 케이블TV로 지상파 방송을 보고 있고, 그 사람들 5명 중 1명은 지상파 방송을 깨끗하게 보기 위해 케이블TV를 신청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케이블TV 사업자(SO ; System Operator 라고 합니다)들로서는 오늘 판결로 다소간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설마, 행여나, SO들이 지상파 방송을 끊어도 그렇게 큰일은 아닐 겁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 글이 시작한 겁니다. 판결을 한 번 뜯어볼까요.

애초에 SBS를 비롯한 지상파 3사는

1) 소송을 낸 시점 이후에

2) '디지털' 케이블TV에 가입한 가입자들을 소송의 범위로 했습니다.

정확한 통계가 없어서 추정치이긴 하지만, 전체 12500만 가입자 가운데, 디지털 케이블 가입자 수는 약 350만, 여기에서 다시 2009년 12월 18일 이후 가입자는 약 40~50만 정도로 추산됩니다. 크다면 큰 수치지만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질 일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더구나 현시점에서 디지털 케이블TV는 공공기관이나 회사에서 주로 가입한 만큼 보통 가정집만을 따져보면 그 숫자는 더욱 줄어들 겁니다. 설령 방송이 끊어지더라도 당분간 아날로그 신호를 받아서 지상파 방송을 보면 그만입니다.

그럼 이번엔 판결 이유를 한 번 볼까요.

지상파 방송사는 콘텐츠 저작권자임을 주된 근거로 사용료를 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판결에서는 침해되고 있는 저작권의 범위가 구체적이지 않다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SBS 채널을 통하여 송신되는 디지털 지상파방송 프로그램 중 (주)SBS가 그 저작권을 보유하는 모든 방송프로그램" 이라는 말만으로는 판단이 어렵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참고로 KBS는 KBS 2TV만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작권에서 파생되는 저작인접권이라는 게 있는데요. 여기에 근거해서 방송사는 자사 방송을 동시에 중계방송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데, 바로 이 동시 중계방송권을 침해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 근거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방송 3사는 소송에서 이겼는데도 케이블 SO가 계속 무단으로 프로그램을 사용할 경우 하루에 1억 원씩 이행강제금을 부과해달라는 청구도 함께 냈는데, 법원은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논리들이 모여서 한마디로 "케이블TV의 지상파 동시 재송신은 위법하다"는 말로 정리가 된 겁니다.



한 때 인터넷 포털사이트가 각 언론사의 기사를 편집해서 메인화면에 걸어놓는 것을 두고 언론사와 포털업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저작권 개념이 확립되어 가는 시기에 치르는 한차례 홍역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케이블TV와 지상파 방송 사이의 분쟁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동시 재송신이 저작권 침해행위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와 업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위성방송과 IPTV가 등장하면서 방송사들은 저작권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건데요. 문제는 케이블TV와의 재송신료 협상이 오랜 기간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유선방송' 시절부터 케이블TV는 지상파의 난시청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왔고, 지상파 방송사들도 그 점을 어느 정도는 묵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왜 이제 와서' 사용료 주장을 하느냐는 것이 케이블 업계의 항변입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문제가 협상테이블에서 법정으로 무대를 옮기게 되니까 이번 판결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SBS 드라마 '자이언트'를 무단으로 재송신하면 얼마를 물어야 하는 걸까요.

온종일 방송을 틀면 그 행위에는 얼마를 물려야 하는 걸까요.

2009년 이전에 케이블TV에 가입했다가 디지털로 바꿔서 계약한 사람들은 이번 판결의 범위에 포함되는 걸까요.. 등등

1심 판결이 나와도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의문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는 판결을 선고하기에 앞서 "정책적 요소가 많아서 당사자 간 협의를 하는 게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라 판단해서 여러 차례 조정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아 선고하게 됐다"면서 오로지 법리적인 판단임을 일부러 밝히기도 했습니다.

결국, 협상테이블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법원의 판단을 구한 것이 아닌가, 라는 게 취재를 하면서 든 생각입니다. 판결의 논리구조가 복잡한 건 둘째치고, "위법하다"는 명제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정치적 문제가 법정에 오르는 일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비슷한 사례가 될지는 몰라도, 헌법재판소가 하고 있는 일을 보더라도 사법부는 현실을 좌우할 힘이 있을뿐더러, 그만한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겠죠.

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건, 사법부로서는 법리적인 관점에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정치적 성격이 강한 사안들도 법정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형식논리만 부딪히는 일이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법부의 말이 법정을 나서면 '그르다'는 말로 바뀌는 일이 늘고 있다는 것이지요. 가끔은 사법부도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서초동 주변에서는 이제 법조계도 전문 직업인의 영역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 가치의 옳고 그름을 논하던 시대가 지나고, 누가 더 창의적인 법 논리와 소송 전략을 개발하느냐가 승소와 패소를 가르는 시대가 된 겁니다. 이 상황이 옳으냐, 그르냐.. 를 고민하는 것도 낡은 생각일까요.

앞으로 어떻게 분쟁이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대가 바뀌고 방송 환경이 급변하고 난 먼 훗날 역사는 이번 판결을 두고 '일개' 프로그램 공급자(PP ; Program Provider)가 '거대' 케이블 방송사업자(MSO ; Multiple System Operator ; '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라고 번역합니다)를 상대로 싸움을 벌였다고 기록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 왜 방송 3사는 소송을 낸 시점 이후의 디지털 가입자들을 소송 범위로 한 걸까요. 오는 2013년부터는 아날로그 방송은 종료되고, 모두 디지털로 전환됩니다. 이번 소송이 옛날 일을 따져 묻겠다기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따져 묻겠다는 성격이 강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