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대물림 통로라는 비판 주목해야
고시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시에 매달리고 있어서 젊은 인재들이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할 기회를 빼앗긴다는 주장도 있었고, 또 이렇게 규격화된 시험으로는 다양한 재능, 또는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뽑을 수 없어서 비효율적이라는 주장도 있었지요.
고시 제도는 옛날의 '과거시험'을 연상시키는 고리타분하고 전근대적인 제도라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분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그런 식의 시험 대신에 다양한 방법으로 인재를 충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개별 현장의 상황을 보면, 일률적인 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력이 배치가 되면 실무는 아는 것도 없고, 해당 부문에서의 전문성은 당연히 없는 인재를 교육시켜서 활용해야 하는 것과, 어느 정도 해당 분야를 잘 알거나 이미 전문가 수준인 인재를 뽑아 곧바로 활용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효율적으로 보일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발표되어 있는 외무고시와 행정고시 개편 방안 모두, 이렇게 표준화된 시험으로 뽑는 인재의 비중을 줄이고 그 자리에 이미 특정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뽑겠다는 겁니다.
외무고시 개편 방안은 외무고시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일정한 시험을 거쳐 선발된 인재들을 '외교 아카데미'라는 외교관 양성 기관에서 교육시킨 뒤 그 성적으로 외교관을 최종 선발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일반전형은 60%로 정하고 나머지는 영어 능통자(5%), 제2외국어 능통자(15%), 분야별 전문가(20%)를 별도로 뽑겠다는 겁니다. 결국 앞으로 외교관의 40%는 이미 외국어를 잘 하거나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죠.
이름하여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이라는 행정고시 개편 방안은 당장 내년에 30%를 자격증, 학위, 전문영역에서의 경력 등을 갖춘 사람을 서류와 면접으로만 뽑고 2015년까지 그 비율을 50%로 늘린다는 겁니다. 결국 두 제도 개편방안의 취지는 모두 지금처럼 표준화된 시험으로 선발하는 비중을 줄이는 것이고, 따라서 외국어 능력이나 학위, 자격증 등을 갖춘 사람은 지금처럼 고시 공부를 하지 않아도 고급 공무원이 될 길이 크게 열리는 겁니다.
정부가 정책을 발표하기 전에 미리 여당과 협의를 거치는 이른바 '당정 협의'조차 없이 발표된 행시 개편안에 대해 행시 출신인 정두언 최고위원과 사법시험 출신인 홍준표 최고위원 등이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필기시험 대신 서류와 면접으로 자격증이나 학위, 전문 분야 경력 등을 갖춘 사람을 뽑는다면 결국 지방이나 서민층 자녀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부모의 경제력이나 직업 등의 차이가 자녀의 학력이나 자격증, 경력 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결국 계층적 차이가 그대로 세습된다는 게 반대 의견의 기본 취지입니다. 과거 고려, 조선시대에 고위 관리의 자녀를 공직에 특별 채용한 '음서 제도'의 부활이라는 비판도 있지요.
사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일정 기간 시험 공부를 해야하는 고시를 통해야만 공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비효율적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정두언, 홍준표 의원의 지적 중에서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격이나 학위, 경력으로 공무원을 뽑는다면 이런 걸 갖출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무원이 될 길은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적,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갖춘 부모를 둔 자녀들이 고위 공무원이 될 기회는 획기적으로 많아집니다.
서류 전형과 면접으로 치러지는 시험이 어떤 폐해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 바로 이번 유명환 장관의 딸 특채 사건이죠. 면접관 5명 가운데 3명이 외부 인사였지만 현직 장관의 딸이, 그것도 이미 계약직으로 근무할 때부터 논란이 있었다는 사람이 버젓이 단독으로 합격했습니다.
1차 원서접수 기간에 외국어 성적표 유효기간이 지나 탈락할 수밖에 없었는데 전원이 서류 심사에서 불합격 처리되면서 2차 공고가 나갔고 덕분에 새로 성적표를 받아 낼 수 있었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어지간히 절차를 복잡하게 만들어도 공정성을 제대로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일정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는 더 있습니다. 97년부터 2003년까지 실시했던 외무고시 2부입니다. 외국에서 초등학교 이상 정규과정을 6년 이상 다닌 사람만 응시할 수 있는데, 외무고시 1부에 비해 시험 과목 수도 적었습니다. 22명이 선발됐는데 그 가운데 41%인 9명이 전현직 장, 차관과 3급 이상 고위직 자제라는 겁니다.
유명환 장관의 딸이 2006년 계약직으로 특별 채용된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외교부에 특채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도 전현직 고위 외교관 자녀인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지금 실시되고 있는 영어 능통자 전형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결국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인 특별 채용이 사회적인 정의 관념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겁니다. 그런 제도를 통해 어느 정도의 효율성이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 제도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신분이 그대로 세습되던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역량이나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사회적 위치의 변동이 가능하다는 게 장점으로 거론되곤 했습니다. 물론 엄밀히 들여다보면 일부의 성공 신화를 통해 사회적 체제 유지를 도모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고급 공무원 공채 제도는 이러한 성공 신화, 즉 사회적 계층의 이동을 허용하는 '계층간 사다리'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법한 세금만 내면 세습이 허용되는 자본 권력과 달리 학계나 공직자 등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논의되는 고급 공무원 채용 방법의 다양화가 지금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계층이 자녀들에게 그런 지위를 보다 용이하게 물려주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공직 사회가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어떤 국가적 정책도 의도했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신분 세습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제도라면 더욱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그 때는 이미 효율의 문제를 넘어서게 됩니다. 정의와 양립될 수 없는 효율은 궁극적으로 훨씬 큰 비효율을 낳게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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