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4일 새벽. 밤 공기는 끈끈하고 불쾌했습니다.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든 A씨는 인기척에 눈을 떴습니다. 술 냄새가 코를 찌르는가 싶더니, 언뜻 검은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갑자기 이불로 얼굴이 가려졌습니다. 주먹과 발길질 세례가 이어졌습니다. "왜 이러는거에요? 누구에요?" 한참을 맞으면서도 A씨에게는 옆에서 자고 있는 7살, 3살 난 손녀 생각 뿐이었습니다
주먹 세례가 끝났습니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바지를 벗은 한 남자가 손녀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차마 입 밖에 내기도 어려운 말을 어린 아이들에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남자의 다리를 잡았습니다.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남자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손 발을 묶고 할머니를 성폭행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이들 쪽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남자에게 아이들 잠시 오줌만 싸게 하겠다며 허락을 받고 현관 밖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알 몸으로 이웃에게 뛰어가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그 사이 남자는 달아났습니다.
어제(6일) 아침 뉴스에서 제가 보도했던 송파구 성폭행 사건입니다. 취재하면서도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야근을 하면서 보고를 받던 선배도 얼굴을 찌뿌렸습니다. 정말 기가막힌 사건이었죠. 그러나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사건을 대하는 경찰의 태도였습니다.
담당 경찰서 형사과장 "어린이는 관계 없어요"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사건을 담당한 경찰서의 형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형사 과장은 마지 못해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순 성폭력'이라고 강변했습니다. 한 밤 중에 자다 일어나 전화를 받은 형사과장은 잠에서 다 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 기자님. 이거 아이들과는 아무 관계 없어요. 아이들은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니까요. 손 발을 묶어요? 묶긴 뭘 묶어요. 그냥 술에 취한 놈이 방에 들어가 여자 성폭행한거예요."
송파경찰서 형사과장은 한사코 이 사건이 아동 성폭행과는 '아무 관련 없는' 단순 성폭행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미 피해자인 A씨와 직접 이야기를 한 상황이었습니다. 글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적나라한 상황에 대해 절절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분노했던 상태였습니다. 형사과장에게 지금 당신 이야기 책임 질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형사과장은 물론이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수사는 허술, 언론 플레이는 '노련'
형사과장 말대로 '단순성폭력'이라 그런건지, 사건 수사 과정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피해자의 집 근처 쓰레기장에는 당시 피해자 A씨가 입었던 옷과 사용했던 이불이 방치돼 있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왜 이렇게 했냐고 물었더니 경찰이 "가족들이 알아서 정리해라"고 했답니다. 옷에는 언뜻 보기에도 혈흔이나 범인의 흔적이라고 볼 만한 것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이런 증거물도 수거하지 않는 수사, 그 동안 본 적이 없었습니다.
피해자가 치료를 받는 과정은 더 황당했습니다. 이웃의 도움으로 겨우 범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A씨는 곧바로 경찰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병원은 A씨가 눈을 많이 다쳤는데 일요일이라 의사가 근무하지 않는다며 인근의 다른 대형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 병원에 갔더니 다시 성폭행 피의자 1차 조사와 치료를 받는 '원스톱 지원센터' 진술과 진료를 받아야 한다며 다시 경찰 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다시 경찰병원에서 진술을 마친 피해자 가족은 입원 치료를 요구했습니다. 병원측은 간단히 답했습니다. "오늘은 당직 의사가 없어서 입원 오더를 낼 수가 없어요." 새벽녘에 끔찍하고 황망한 일을 당한 피해자 A씨는 결국 병원을 왔다 갔다 한 끝에 입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저런 내용을 취재하고 있는데 형사 과장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확인 해보니까....아이들이 현장에 있었던 건 맞네요."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았고, '아동 성범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송파 경찰서를 담당하는 강남 출입 기자들에게는 여전히 '아이들과는 관련이 없고', 'SBS 기자가 왜곡한거다'라고 '언론 대응'을 하고 있었더군요. 수사에는 무능한 경찰이 언론 플레이에는 밝은 모양입니다.
'걸리면 피곤하다. 왠만하면 그냥 가자'
송파경찰서는 왜 그렇게 끈질기게 '아동 성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을까요? 최근에 있었던 경찰 수뇌부의 '아동 성범죄와 전쟁' 선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며 위에서 관심 가지는 민감한 사안에 괜히 손대기 싫다는 거죠. 아이에 대한 성폭행 시도가 있었고, 이를 막으려는 할머니가 대신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나면, 각 종 언론이 경찰 수사를 감시할 것이고 이러면 그동안 태만하게 수사했던 내용도 불거질테니까요. 신속하게 피의자를 검거하지 못하면 언론의 질타도 이어질테구요. 수뇌부는 '전쟁'을 선포했는데, 현장에선 '내가 안해도 싸울 놈들 많은데 뭐...'라며 납작 엎드린 형국인 거죠. 그런 이유로 지난번 동대문 경찰서도 외국인 어린이 성폭행을 '성폭행'미수라고 물을 타려다 발각돼서 혼쭐이 났고, 영등포 경찰서도 김수철 사건을 축소하려다 걸려서 지금 감찰 조사를 받고 있죠. 그럼에도 경찰은 도무지 변하질 않습니다. 상록수 처럼요.
어떤 이들은 각종 매체가 연일 어린이 성폭행 관련 보도를 내놓는게 피곤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좋은 이야기도 3번 들으면 지겹다는데, 아동 성범죄 이야기 자꾸 들으면 지겨울 법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 언론이 보도하고, 감시하고, 질문해도 우리 경찰이 진정 '민중의 지팡이'로 변모하기는 정말 어려운가 봅니다. 그냥 이런 민감한 시기에 '튀지 않고' 잘 넘어가는게 경찰의 본분일까요? 여러가지 이우로 답답하고 불쾌한 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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