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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 울려 퍼진 아리랑

주영진

입력 : 2010.06.11 09:46

"한국은 그대들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


어제 저녁 워싱턴의 케네디센터에서는 뜻깊은 공연이 있었습니다. 리틀 엔젤스 공연이었는데요, 한국 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 한국을 도와줬던 나라들을 찾아가는 순회공연의 첫 순서였습니다. 공연의 주제는 "한국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전쟁이 터진 뒤 일주일도 안돼서 참전을 시작한 미국을 비롯해 영국과 콜롬비아,이디오피아등 16개 나라를 일일이 도는, 그래서 공연기간만 1년이 되는 야심찬 기획이었습니다.

사실 리틀 엔젤스라는 이름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습니다. 조금 더 커서는 그 배경에 특정 종파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정도죠. 1970년대 흑백텔레비젼 시대에도 리틀 엔젤스(그 때는 리틀 엔젤레스라고 했던 것 같네요)의 공연 모습을 텔레비젼에서 본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공연 내용이라는 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것들이어서 사실 큰 기대를 하고 케네디센터를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뉴스 아이템 하나 만들지 뭐.. 하는 마음이었죠. 다만 "한국은 도움을,은혜를 잊지 않는 나라"라는 주제가 조금 묵직하게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기는 했습니다.

공연 시작 전 리셉션이 있었습니다. 어제와 오늘 공연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한 특별무료공연이어서, 공연 시작에 앞서 참전용사들과 가족이 잠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거죠. 미리 인터뷰를 해놓자는 마음으로 몇명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쌍둥이 동생이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숨졌다는 이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책까지 썼다고 합니다. 

   

잊기 전에, 잊혀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인터뷰한 사람은 샘 존슨이라는 연방 하원의원입니다. 한국전 참전용사로 아직도 정치권의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해 보이더군요. "당신 인생에서 한국전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멋집니다.

"자유를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 싸움으로 한국은 자유롭게 됐고 지금도 자유롭습니다. 더우기 세계 자유국가권의 등대같은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공연 시작전 무대 인사가 있었는데  이 때도 샘 존슨 의원은 큰 박수를 받더군요. 백발의 노인이 인사는 거수경례로 했습니다. 어제 공연장은 거수 경례가 어울리기는 했습니다.

리틀 엔젤스 공연이야 사실 새삼스러울 게 없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린 친구들이 나와 때로는 앙증 맞게, 때로는 아름답게 온갖 춤사위를 펼쳐 보입니다. 대부분이 춤이고, 노래는 가야금 병창이 전부입니다. 물론 마지막 무대는 피아노 한대를 무대 중앙에 놓고 단원들이 양쪽에 도열해 너댓곡 합창을 하는 순서였습니다. 미국인들을 위해 "God bless America!""를 부르더군요. 물론 한국인인 제 귀에 오래 남은 노래는 당연히 아리랑이죠.

아리랑이 울려퍼지며 공연이 끝나자 2천2백석의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이 모두 일어나서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멀리 미국에까지 찾아와서 멋진 공연을 해준 어린 친구들이 기특하기도 했고, 60년이나 지났지만 자신들의 도움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성의가  고맙기도 했을 법 합니다. 공연이 끝난 뒤에 인터뷰를 한 헤이스라는 흑인 할아버지는 아리랑 가락을 흥얼거리며 "이 노래는 정말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노래다. 한국전쟁때 많이 들었다."며 신나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 구슬픈 사연을 떠올리는 한국인들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아리랑 가락에서 60년전 낮선 나라 한국의 산과 벌판을 강행군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공연은 1부와 2부로 나눠 진행됐는데요, 2부 공연 시작전에 인사말을 한 가르시아 전 하원의원도 감회에 가득찬 목소리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은 진정으로 지킬 가치가 있는 나라였습니다. 이 곳 한국전 기념공원에 가면 이런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저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과거에 싸웠던 것처럼 또 다시 한국을 위해 싸울 용의가 있습니다. 한국은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나라입니다."

이번 공연을 보면서 새삼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있습니다. 일단 한국에서는 고루하다고 생각했던 전통춤 공연을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6.25라고 불렀던 한국전쟁이라는 말이 유달리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8순의 노인들이 된 참전용사들을 보면서 얼마 안있으면 이 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결코 어려울 때 한국을 도와준 사람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주제도 와닿았습니다. 한국전쟁이 당시 미국과 소련을 양축으로 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세력 다툼이었고, 한반도는 그 다툼의 희생양이 돼버렸다는 측면, 미국을 한반도 남쪽을 일종의 군사기지,전진기지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등은 잠시 밀어놓았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왜 오늘 공연을 관심있게 봤고, 공연의 주제를 묵직하게 받아들였는지를 곰곰히 되짚어 봤습니다. 분명한 대답은 나오지 않더군요. 다만 여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이고, 제가 이제 40대가 됐고, 참전용사들을 그 누구보다 존중하는 미국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 같기는 합니다.  어쨌든 찢어지게 가난하고, 그래서 비참했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 15위안에 들어가는 번듯한 나라가 되어서 당시 은혜를 베풀었던 나라들에게 "고맙습니다.잊지 않겠습니다."고 인사하는 모습이 나쁘지는 않아 보입니다.한덕수 주미 대사도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이렇게 글을 줄이려니까 가르시아 전 의원이 말했던 한국전 기념공원의 또 다른 문구가 다시 떠오릅니다.

"생전 가보지도,만난 본 적도 없는 나라와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달라는 조국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해준 사람들과 그들의 어머니를 미국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