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뉴스

뉴스 > 생활·문화

야외 공연의 매력에 흠뻑 빠지다

김수현

입력 : 2010.06.01 22:58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파크 콘서트


*뒤늦은 공연 관람 후기-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파크 콘서트(5월 15일, 올림픽공원)

대학 다닐 때 '서양 음악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음악회를 보고 나서 리포트를 제출하는 과제가 있었다. 이 과목을 들었던 과 친구들 여섯 명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음악회에 함께 갔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생전 안 입던 정장 차림이었다! 우리는 콘서트 홀 합창석에 '엄숙하게' 앉아 음악회를 관람하고, 큰 행사를 치른 듯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클래식 음악회는 정장 입고 격식 차리고 가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 대학 3학년 방학 때 처음으로 가 본 야외 음악회는 나에게 '문화적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당시 호주 시드니에서 근무하던 작은 아버지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해외 여행'이란 것을 하던 참이었다. 두 달간 호주에 머무르면서 구경한 관광 명소들도 좋았지만, 호주 사람들의 여유로운 일상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초록빛 잔디밭 위에서 소풍 나온 듯 즐겼던 야외 음악회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음악회는 시드니 도심의 한 공원에서 열렸다. 연주단체나 곡목은 사실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나는 음악 자체보다도 잔디밭 여기저기 흩어져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에 더 끌렸다. 사람들은 앉아서, 누워서, 또는 연인의 품에 기대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었다. 오케스트라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을 연주할 때 진짜 대포 소리가 울렸고, 사람들은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했다.

나도 피크닉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음료수를 홀짝거리면서 그 순간을 만끽했다. 푸른 하늘과 초록빛 잔디, 따사로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 날아가는 새 소리, 윙윙거리는 날벌레 소리, 여유로운 사람들의 모습, 이 모든 게 공연의 한 부분이었다. 이런 음악회도 있구나! 행복했다. 이후에도 나는 야외 공연을 몇 차례 봤지만, 이 때의 '첫 경험'을 넘어서는 감흥은 느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달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파크 콘서트에서, 나는 오래 전 느꼈던 이 행복감을 다시 느꼈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그 유명한 영국의 음악축제 'BBC 프롬스'의 상주 연주단체다. 나는 영국 연수 시절 BBC 프롬스의 파크 콘서트를 TV로만 접하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으니, 이번 공연은 조금이나마 이 아쉬움을 달래는 자리이기도 했다.

10대가 된 이후로 클래식 음악회라면 질색하는 큰 딸 은우도, 집에서 오케스트라 음반만 틀어놓으면 '시끄럽다'며 꺼버리는 일곱 살 은형이도, '공원에 놀러가자'고 살살 꾀어 데려갔다. 남편까지 동행했으니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한 나들이였던 셈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바깥 간이 무대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는 분위기를 돋웠고, 아이들은 매점에서 우동과 떡볶이, 아이스크림으로 '군것질의 욕망'을 채우며 즐거워했다. 

줄을 서서 관람구역을 표시하는 팔찌를 하나씩 차고(아이들은 이것도 재미있어 했다), 88 잔디마당에 마련된 공연장으로 입장했다. 우리는 객석 앞쪽, 오케스트라가 잘 보이는 자리였지만, 막상 가 보니 가장자리 가족 석과 피크닉 석에 더 끌렸다. 돗자리 깔고 누운 사람, 나무에 기대 앉은 사람, 도시락을 펼쳐놓은 사람, 맥주 캔을 손에 든 사람, 다양한 청중의 모습이 펼쳐졌다.

대규모 야외 공연이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을 스피커를 통해 듣게 되니, 객석 앞쪽이라고 음향이 더 좋은 건 아니다. 내 자리는 오히려 스피커에 지나치게 가까워 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조금 더 뒤쪽이었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 같다. 무대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어차피 오케스트라의 연주 모습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중계되기 때문에 뒤에서 봐도 크게 지장은 없다. 그러고 보면 가격도 저렴한 가족 석과 피크닉 석이 이번 파크 콘서트의 특석이었던 셈이다. 

이리 벨로흘라베크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 서곡, 세 개의 춤곡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공연 내내 아이들의 반응에 신경이 쓰였다. 별 관심 없어 하는 아이들을 살살 꾀어서 데리고 왔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일찌감치 '난 엄마가 좋아하는 공연에는 관심이 없어'라고 선언했던 은우는, 그러나 별 군소리 없이 관람에 몰두하는 것 같았다. 흥겨운 분위기의 춤곡이었던 데다, 대형 스크린에 클로즈업되는 연주자들의 모습이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은형이는 들고 갔던 커다란 인형을 자기 옆에 앉힌 채 대형 스크린을 주시했다. 가끔씩 주변 사람들을 두리번두리번 쳐다보긴 했지만, 비교적 얌전했다. 영상에 익숙한 아이들이라 그랬을까, 육안으로도 무대가 잘 보이는 자리였지만, 아이들은 주로 스크린을 쳐다봤다. 

아이들은 두 번째 곡이었던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에서부터 '급 관심 모드'로 전환했다. 전에 여러 차례 들었던 곡이라 멜로디에 친숙했고, 젊디젊은 피아니스트 지용이 마치 대중문화의 '아이돌' 같은 이미지로 느껴졌다는 점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피아노 자체의 소리가 답답하게 느껴져 아쉽긴 했지만(나중에 알고 보니 이 피아노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새 피아노였다고 한다), 지용은 패기 넘치는 연주로 협연을 마쳤다.

 지용은 열광적인 관객의 환호에 답하고, 슈만의 '헌정'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지용은 올가을 예술의 전당에서 독주회를 열 예정이다. 그 때 다시 그의 연주를 들어보고 싶다.

은우는 옆에서 '엄마, 저 오빠 몇 살이야? 한국 사람이야?'하고 속삭였다. 나는 은우의 관심이 반갑고도 재미있었다.

'한국 사람 맞고, 되게 젊대(지용은 91년생이다). 저 오빠 가을에 독주회 한다는데, 그 때도 보러 갈래?' 하자 은우는 '피!'하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해가 지면서 화창했던 날씨는 조금 쌀쌀해졌다. 1부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보니 발 빠른 사람들이 하늘색과 분홍색 하트 무늬 담요를 팔고 있다.

아이들이 진열된 담요를 뒤적거리며 사달라고 졸라대서 한 장씩 사줬다. 2부가 시작될 즈음 자리로 돌아와 나는 은우와, 남편은 은형이와 담요를 나눠 덮었다. 이것도 야외 공연 보는 재미라면 재미겠다. 어둑해진 하늘에 새들이 날아갔고, 차가운 저녁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흥겨운 박진감과 짙은 애수를 오가는 이 곡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새삼 실감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은형이가 2악장 잉글리쉬 호른의 그 유명한 주제 선율을 ‘따라라, 따라라, 따라라라라~'하며 함께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음악에 푹 빠진 것이다. 4악장, 연주가 피날레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의 상기된 표정이란! 더 이상 아이들의 반응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도, 나는 아이들이 음악에 푹 빠진 모습이 반갑고 기뻐 자꾸만 훔쳐봤다.

여러 차례의 커튼콜 끝에 연주된 앙코르는 홍난파의 '고향의 봄'. 어린 시절 너무나 많이 불렀던 노래지만,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국 관객들을 위한 특별한 선곡에 감동하며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대형 스크린에는 '고향의 봄'을 따라 부르며 즐거워하는 청중들의 모습이 비쳤다. 중계 카메라 렌즈가 우리 가족이 앉아있던 객석을 훑고 지나가자 아이들은 '저기 우리도 나왔어!' 하고 화면을 가리키며 즐거워했다.

오케스트라는 열광적인 반응 속에 앙코르를 두 곡이나 더 연주했는데, 푸치크의 '검투사의 입장'과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휘자 벨로흘라베크는 이 날 연주된 스메타나와 푸치크, 드보르작을 모두 낳은 체코 사람이었다. 체코 지휘자가 이끄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탄탄한 연주로, 체코 음악의 매력에 흠뻑 젖은 셈이다.

앙코르 연주까지 모두 끝났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기립 박수를 보내고, 아쉬워하며, 행복해 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다시 확인 받고 싶어서 은우에게 '재미있었지?'하고 물었고, 은우는 흔쾌히 ‘응, 재미있었어. 밖에서 음악회 하니까 좋네~’ 하고 대답해 줬다. 은형이에게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계속해서 '신세계로부터'의 주제 선율을 흥얼거리고 있었으니까.

연주 좋고, 분위기 좋고, 이런 야외 음악회를 좀 더 자주 만났으면 한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시드니에서 봤던 야외 음악회도 좋긴 했지만, 빠진 게 하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가족과 함께 즐기는 기쁨 말이다.